박정희(왼쪽)와 이병철.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이병철을 불러 농약공장 건설을 권유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
1963년 10월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정희는 이병철을 청와대로 불렀다. "이병철 사장은 이제 일을 피하지만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 경제재건에 적극 참여해 주십시오." 박정희의 권유였다. 당시 이병철은 일을 피했다기보다는 5·16혁명으로 부정축재자 1위가 되고, 상당한 벌금까지 낸 상황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농약공장의 건설을 권유했다.
이병철은 "기술, 자금, 시장성 등을 아직 검토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농약공장 건설 정도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비료공장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 문제도 이병철은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이 사장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습니까?" 박정희가 다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역부족일 뿐입니다." 이병철은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 미국 등지를 방문해서 비료공장 건설을 추진했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이병철이 역부족이라고 대답한 것에 대해 박정희는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병철이 비료공장 건설을 위해 한때 동분서주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는 이병철의 심사를 짐작했다.
"이 사장이 역부족이라면 다른 사람은 더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테니 비료공장을 지어 주십시오." 박정희가 다시 한번 부탁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내가 전적으로 뒷받침하겠습니다." 박정희는 농촌 출신이어서 비료가 농촌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병철의 비료에 대한 원대한 구상도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적극적이었다. "대통령께서 혼자 애써 주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행정부는 물론 거국적인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행정부의 적극적 협조 없이는 이와 같이 큰 사업은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당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보신주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이병철로서는 필요한 주문이었다.
美 원조기관 자금 문제로 제동
박정희가 직접 나서 사태 해결
요소비료 세계 최대 연산 33만t
美·서독·日에 기계 설비 견적
日 공장건설 협력, 업계선 반대
현지 재계인사 이병철에 호의적
이나야마 경단련 회장의 결단
미쓰이 물산으로 창구 단일화
1959년 건설된 충주비료공장, 22만평 부지 위에 수만평의 건물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당시로선 최신식 공장이었다(위). <삼성그룹 제공> 1962년 7월 충주비료공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
◆비료공장 규모부터 검토
사무실로 돌아온 이병철은 공장의 규모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삼성의 경영진들은 연산 25만t 규모로 시작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그 정도의 규모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일본에는 연산 18만t 규모의 공장이 있는데 이것이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이병철은 일본보다는 두배 더 큰 36만t 규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일본보다 두배 큰 36만t 규모의 비료공장을 계획한 것은 10년 후의 비료수요를 내다봤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의 경작면적과 비료사용량을 국제비교한 결과 시장은 충분하며 가격경쟁력만 갖추면 해외수출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비료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일이 시작되면서부터 하나둘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동을 건 것은 미국의 유솜(USOM)이었다. 유솜은 미국의 원조기관이다. 유솜 측은 한국의 제3·4 비료공장도 미국이 투자해 준 것인데 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을 건설해 공급과잉이 발생하면 장차 어떻게 막대한 원리금을 갚아나갈 것인가 물었다. 말하자면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박정희가 유솜의 대표자 킬렌을 만나 협력을 촉구했다. 결국 킬렌은 손을 들었다. 첫 번째 난관이 제거됐다. 건설계획서가 나왔다.
공장의 생산규모는 요소비료 연산 33만t 규모였다. 본래 구상보다는 3만t이 적었으나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요소비료를 1년에 33만t이나 생산하려면 요소를 하루에 1천t, 암모니아를 하루에 6백t 정도 생산할 수 있어야 했다. 암모니아 6백t으로 요소비료를 1천t 가량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일본제 요소비료 제조의 특허는 일본이 가지고 있었고, 암모니아 제조의 특허는 영국의 ICI사가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는 요소나 암모니아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이 전무했다. 기계를 일본측에 발주할 예정으로 있었으므로 하루 1천t의 요소생산설비가 가능한 것인가를 물었다. 일본도 하루 1천t의 요소를 생산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회답이 왔다.
그러나 이병철은 성능이 좋은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 견적서를 내도록 했다. 미국, 일본, 서독이 그 나라들이었다. 기계설비비로 미국이 6천5백만달러의 견적서를 냈고, 서독이 6천만달러, 일본이 5천만달러의 견적서를 내었다. 우선 가격이 가장 쌌고 또 일본기계의 성능을 잘 알고 있었던 이병철이어서 일본부터 방문했다. 정부 측에서는 비료공장 건설을 삼성에 일임한다는 장기영 장관 명의의 공문을 만들어줬다.
이나야마 요시히로 경단련 회장. 〈일본기자 클럽 제공〉 |
◆일본 재계와 접촉
도쿄에서 우선 미즈카미(水上)미쓰이물산 사장,이나야마 야하타제철 사장, 가이지마 고오베 제강 사장 등을 만났다. 정부의 공문을 보여줬다. 그 자리에서 이병철은 미국과 서독, 일본 등 3개국으로부터 비료공장 건설에 따른 견적서를 받았다. 일본에 비료공장 건설을 의뢰하고 안하고는 오직 여러분의 협조 여하에 달렸다라고 말했다. 5천만달러 짜리 상담은 당시 한국 최대였다. 이나야마 야하타제철 사장은 매우 놀라면서 우리가 최대한 협력할 테니 일본에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의 비료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한국은 일본 비료업계의 가장 큰 시장인데, 한국에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이 들어서게 되면 그 시장을 잃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해외시장에서도 경쟁상대가 되는 것이다.
일본정부도 일본 비료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존공장에 새로운 기계를 대체해주거나 증설을 위한 허가 및 자원지금 등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비료업계는 갑자기 공장시설의 신규투자와 증설이 늘어났다. 그러나 훗날 이런 투자 때문에 일본의 비료업계는 공급과잉상태에 빠져 과당경쟁이 속출하고 가격이 폭락하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비료업계의 반대와는 달리 일본의 재계인사들은 이병철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특히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이 이병철 사장에게 협조적이었다. "한국의 비료공장만큼은 꼭 일본이 맡아야 한다. 일본의 플랜트는 구미공장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거리가 가까워서 아프터서비스에도 편리하다. 이러한 실리적인 조건 외에도 일본 재계로서는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에 협력해야 한다. 한국 농민에게 절실한 비료공장을 일본의 협력으로 건설하게 되면 한일 간의 선린우호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나야마 사장은 미쓰이 물산, 미쓰비시 상사, 고오베 제강 등 세 회사가 공동창구가 되어 가격과 차관조건이 가장 유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공동방식으로는 일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우므로 창구를 단일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나야마 사장은 그러한 문제는 자신에게 일임해달라 하면서 이병철에게 어느 회사가 가장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홍하상 작가 |
이병철은 미쓰이 물산이 좋겠다고 말했다. 미쓰이 물산의 미즈카미 사장과는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미즈카미 닷조(水上達三.1903-1989)사장은 일본 재계의 중진으로 1903년 야마나시현의 농가 출신이다. 고후(甲府)중학과 도쿄상대(현재의 히도쓰바시대로 일본의 사립대 중에서는 최고의 명문으로 꼽힘)를 나온 후 미쓰이 물산에 입사했다. 1938년 비료과 주임, 비료과장을 거쳐 중국의 텐진, 베이징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1946년 귀국, 본점에서 부장대리로 승진했다. 1947년 7월 연합군 전시사령부의 재벌해체 명령에 따라 무역회사 제일물산을 설립, 37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다. 그 후 1959년 제일 물산이 미쓰이 물산과 합병하면서 부사장이 됐고, 1961년에는 사장, 1970년에는 회장으로 취임했다.
일본재계는 삼성 이병철의 비료공장 건설 건에 관해 결론을 내렸다. 여러 회사가 한국의 비료공장 건설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각자 주장이 강했다. 일본재계의 수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 경단련 회장이 결론을 내렸다. "일은 잘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원칙이다. 발주자인 이병철 회장의 희망도 있고 하니 창구를 미쓰이 물산으로 단일화하자"라고 제의했다. 결국 비료공장 건설은 미쓰이 물산을 단일창구로 추진하게 됐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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