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정치가 멀쩡할 때 국무총리는 그리 주목받는 자리가 아니다. 정권 차원에서 책임질 일이 생기거나 국면전환이 필요할 때 대통령이 쓰고 버리는 카드로 인식되곤 한 게 대한민국 총리직이다. 행정 각부를 통할하고 장관 제청권을 가지지만 자신을 포함한 실제 인사권은 모두 대통령 몫이니 대통령의 '정치적 방패'로 봐도 그만이다. 정권의 장식품이거나 소모품이라는 듣기 거북한 비판도 따라붙는다.
그래선가, 고 최일남 작가는 한 신문 칼럼에서 그 자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으로 잔뜩 치켜올린 총리는, 실상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리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때 되면 내려가는 헐렁한 현직(顯職)에 불과하다. 의전 총리, 대독총리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정권의 '들러리' '얼굴마담' '소방수'라는 별칭이 하릴없이 조작해낸 말장난이겠는가."
# '난리굿을 친' 정부 제2인자
아무것도 못 한다는 그 총리직이 지난 6개월, 계엄-탄핵-대선정국에서 국민에게 꽤 달리 인식된 것 같다. 비상시 그들의 역할, 파급력이 엄청나고 대통령 유고(有故)보다 더 나라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겠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3명의 전 총리가 좌충우돌, 정치에 끼어들고 숟가락을 얹으면서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를 만들어갔다. 시쳇말로 "난리굿을 친다"란 표현까지 나왔다. 국민은 이런 사람들이 행정부 간판, 정부의 제2인자였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했다.
첫 블랙코미디 상은 한덕수 전 총리가 차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내란 동조 혐의자인 그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직을 낚아채려 한 시도는 또 다른 새 쿠데타에 다를 바 없었다. 공직 후보를 투표로 선출하는 민주주의에 반하고 인간 도의에도 어긋난, 말 그대로 잡배(雜輩) 짓이었다. 경선 참여는 물론 입당도 하지 않고 투표로 뽑힌 진짜 후보에게 자리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걸 온 국민에게 생중계로 보여주더니 새벽 도둑 입당, 단독 후보 등록을 마쳐 원내 제2당의 대선 후보직 탈취 직전까지 갔다. 당원들의 집단지성이 발동해 쇼는 결국 무효가 됐으나 세계적 비웃음을 피하진 못했다.
한 전 총리는 그에 앞서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러 가서도 낯 뜨거운 쇼를 펼쳤다. 시민단체들이 내란 동조범 물러가라며 출입을 저지하자 느닷없이 손나팔을 만들고 "여러분, 저도 호남사람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안 됩니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영남 출신 대통령 때 출신지를 서울로 고집하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전북 출신이라고 고쳐 썼다는 보도를 의식해서일까. 그렇더라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연이어 '광주사태'로 칭한 데다 5·18의 아픔과 한을 호남만의 문제로 축소하는 듯한 그 저열한 의식에 시민들은 더 틈을 내주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였던 사람의 수준에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 수준 차이를 드러낸 토론회
수준 문제를 말하자면 제44대 총리 황교안 전 총리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정선거 혁파를 내세우며 이번 선거에 나선 그는 후보 토론 현장에서 사기 등 전과 17범 후보(본인이 선거 공보에 밝힌 사실)에게 면박당하고 정신 차리라는 충고성 질타도 들었다. 중앙선관위 주관으로 열린 '초청 외 군소후보 TV 토론회'에서 황 전 총리는 끈질기게 부정선거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상대 송진호 후보는 "부정선거 척결을 주장하며 계엄령을 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을 탄핵한 건 부정선거 내용이 탄핵당한 것"이라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래도 황 전 총리는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며 그 해체까지 주장했고 송 후보는 "관리가 잘못됐더라도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선관위를 해체하라는 건 너무 극단적"이라고 받아쳤다. 또 국내 중국인에 대한 혜택이 커 우리 국민이 역차별당한다는 주장에도 "대한민국은 차별과 편견이 없는 기회의 나라라고 선전하며 국가정책을 세우고 있는데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다문화가정에 대해 차별과 편견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점잖게 타이르는 조로 설명했다. 이러니 도대체 누가 나라의 큰일을 맡았었고 진정으로 나라의 틀과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전 총리의 상황 인식이 고작 이 정도냐는 한탄이 줄을 이었다.
# "호남서 이름 석 자 지우겠다"
여기서만 그쳤으면 내란 세력과 절연치 못한 보수 계열 전 총리들이 싸지른 뭣 같은 상황이라고 치부하고 말았을 수 있다. 선거 막판 문재인 정부 첫 총리인 이낙연 전 총리가 느닷없이 "김문수 후보와 저는 제7공화국 공동정부를 구성하겠다"라며 김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이 초래할 '괴물 독재국가'를 막겠다는 이유였다. 보름 전 대선 불출마선언을 하며 "다른 사람 선거를 돕지도 않겠다"라고 한 말을 100% 뒤집으며, 25년 진보 정치 역정과 정반대 선택을 한 데 대한 비판이 빗발쳤다. 특히 민주당과 그의 정치 기반 광주 전남에서는 "내란 세력과 한 몸이 되어서라도 정치적 욕망을 실현해보겠다는 민낯을 드러냈다"라며 "호남서 이름 석 자를 지우겠다"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한때 그와 함께 정당 일을 했던 정치인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남 탓 같은 게 내면의 감정을 넘어 결정과 판단을 지배한다면 공적인 일에서 물러나야 한다"라며 "민주 헌정을 파괴하려 했던 내란 동조 세력과 개헌을 매개로 연대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라고 통탄했다. 또 다른 의원은 "이 전 총리에겐 오로지 저 자신밖에 없다. 오직 누구를 반대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쭉 걸어온 정치 인생을 통째로 뒤집고 그동안 사랑하고 지지해준 민심을 내동댕이쳤다"라며 그가 가는 건 정치의 길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상투적 표현이지만 '나라의 어른', 국정 2인자 총리직을 지낸 사람 3명이 나라가 혼미한 때 앞장서 바른길을 찾아주긴커녕 오히려 미로로 끌고 간다는 여론과 총리 무용론까지 대두됐다.
#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생!"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새 총리 후보로 김민석 의원을 지명했다. 그는 작년 8월 민주당 회의에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가능성을 가장 먼저 경고한 사람이다. 10월부터는, 집권 플랜 본부를 가동해 조기 대선 준비를 해왔다. 계엄 선포 두 달 전 이미 계엄-탄핵-대선을 염두에 뒀다는 얘기다. 놀라운 통찰력, 정보 분석력이다. 그런 그가 지명 첫마디로 "국내 경제와 민생 상황이 IMF 때보다 더 어렵다"라면서 "첫째도 민생, 둘째도 민생, 셋째도 민생과 통합을 챙기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말을 그대로 이루어야만 전임 세 총리가 좌충우돌 무너트린 신뢰를 반쯤이나마 회복한다는 걸 단 하루도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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