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푸른길, 이야기를 따라 걷다] 7. 관어대에서

  • 박관영·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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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30 20:35  |  발행일 2025-07-30
“숨이 차오를 즈음 만난 전망대…산·바다·강·들판·모래밭이 광활하다”

해발 183m 상대산 정상에 2015년 지은 정자

목은 이색 선생이 유년시절 올라 보았을 풍경들

솔밭 따라 후포까지 이어지는 고래불명사이십리

S자로 반짝이는 송천 뒤로 병풍같은 등운·칠보산

 

산마루 아래 영해면 소재지엔 독립만세기념비

대진항 북방파제 북쪽 김도현 선생 기리는 도해단

괴시리 전통마을에서 대진항 방향으로 간다. 저 앞에 돌올한 상대산이 온 몸으로 다가온다. 영해평야를 가로지를 때도, 괴시마을의 입구에서도, 또 마을 안길에서도 고개만 돌리면 거기에는 언제나 상대산이 있었다.


목은 이색은 상대산을 '관어대(觀魚臺)'라 하고 글을 남겼는데, 그 서문에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다. 동해 석벽 밑에 임하여 노는 고기를 셀만하므로 그렇게 이름 한 것'이라 명명의 뜻을 밝혀 놓았다.


대진항에 미치기 전, 괴시2리 마을 안쪽으로 관어대 이정표를 따른다. 블루로드 6코스는 '관어대 5경'이다. 괴시마을에서 대진해수욕장까지 3.3㎞의 짧은 길이지만 산과 바다와 강과 들판과 모래밭이 모두 그 안에 있다.


영덕 상대산의 관어대. 관어대라는 이름은 목은 이색이 남긴 글 '노는 고기를 셀만 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영덕 상대산의 관어대. 관어대라는 이름은 목은 이색이 남긴 글 '노는 고기를 셀만 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영덕 상대산의 가파른 산길 끝에서 아름다운전망대에 다다를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발아래 송천과 영해, 병곡 들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덕 상대산의 가파른 산길 끝에서 아름다운전망대에 다다를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발아래 송천과 영해, 병곡 들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대산 관어대


산길은 가파르다. 많은 이들이 길어도 30분이라 했는데, 숨 고르느라 시간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숨이 턱 차오를 즈음 '아름다운 전망대'가 나타난다. 발아래 송천이 제법 풍성하고 그 물길 너머로 영해와 병곡 들판이 정갈하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송천은 낙동정맥 학봉에서 발원해 영덕의 주요 지역을 굽이치며 장장 29㎞를 흘러와 상대산 아래에서 동해와 만난다. 송천 하구로부터 북쪽으로 커다랗게 초승달을 그리는 모래밭을 쫓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위허위 정상을 향해 내닫는다. 그리고 진짜, 정말로 조금만 더 오르면 상대산 정상이다. '상대산 183m'를 가슴에 품은 귀여운 고래 조형물 너머로 창해가 망망하다.


산마루에는 관어대 현판을 단 정자가 있다. 2015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당당한 규모다. 과하지 않은 높이의 용마루에 수려하게 내려펼쳐진 추녀마루가 도저하다. 누마루를 구태여 높이지 않은 것은 상대산을 누대로 삼았기 때문일 게다.


빙글 뒤 돌아 서쪽을 바라보면 창수령, 맹동산, 봉화산 등으로 이어지는 첩첩 산마루금 아래 영해면의 복작복작한 중심부가 고요히 자리한다. 면소재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영해만세시장과 영해 독립만세기념비는 부러 들러볼 만하다. 1919년 3월18일, 영해장날을 기해 북부 4개 면민 3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장소다.


영덕 영해 3·18독립만세 운동 기념탑. 기념탑이 있는 자리에서 1919년 영해장날 북부 4개면민 3천여명이 만세를 불렀다.

영덕 영해 3·18독립만세 운동 기념탑. 기념탑이 있는 자리에서 1919년 영해장날 북부 4개면민 3천여명이 만세를 불렀다.

넓디넓은 들판 가운데에서 S자로 반짝이는 송천을 본다. 들판 뒤로는 등운산과 칠보산이 병풍으로 펼쳐진다. 송천 건너 북쪽으로 이어지는 초승달 같은 모래밭은 '고래불'이다.


목은 이색은 유년시절 이 산에 올라 저 모래밭을 바라보았고, 바다에서 고래들이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외쳤다. 고래불이다!


'고래불명사이십리'는 짙푸른 솔밭에 기대 울진 후포까지 이어진다. 목은 선생은 관어대에서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다/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고요하면 거울을 닦아 놓은 듯하다/ 바람의 신이 풀무질을 하는 곳이고/ 바다의 신이 거처하는 집이다/ 고래들이 떼 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흔들고/ 사나운 새 외로이 날면 그림자 저녁놀에 잇닿네'


서거정(徐居正)은 목은 선생의 글을 읽은 뒤 이곳에 오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는데, 무술년 초겨울, (아마 1478년에) 마침내 여러 벗들과 함께 관어대에 올라 '후관어대부(後觀魚臺賦)'를 남겼다.


'각자의 형상 각자의 빛을 지니고/ 스스로 울고 스스로 달리고/ 스스로 날고 스스로 뛰는 자가/ 어느 것이 물(物) 아닌 게 있으리오'


1466년 병술년에 36살의 김종직이 관어대에 올라 남긴 글도 자주 언급된다. 차운의 어조는 각자의 시대와 상황, 그리고 성정에 따라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영덕 대진리 남방파제 해안도로 아래에 위치한 원생대 변성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밝은 색과 어두운 색 광물이 번갈아 줄무늬 모양을 이룬다.

영덕 대진리 남방파제 해안도로 아래에 위치한 원생대 변성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밝은 색과 어두운 색 광물이 번갈아 줄무늬 모양을 이룬다.

◆대진의 바다


남쪽으로는 멀리 포항 장기의 호미곶이 손에 잡힐 듯하다. 남동쪽 바로 아래에 보이는 마을은 대진리다. 대진항의 짧은 남방파제 끝에 하얀 등대가 서 있고, 긴 북방파제 끝에는 붉은 등대가 서 있다. 근래 해상전망대와 해안 산책로, 경관 벽화 등을 조성해 알음알음 소문이 나고 있다. 방파제와 갯바위에서 감성돔, 노래미 등 다양한 어종을 잡을 수 있어 낚시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장소다.


남방파제의 남쪽 해안도로 아래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는 원생대 변성암 해변이다. 대진리의 변성암은 약 20억 년 전인 고원생대에 형성된 편마암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 중 하나다.


기존의 암석이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아 만들어졌는데, 밝은 색 광물과 어두운색 광물이 번갈아 줄무늬 모양을 이루는 호상 구조와 밝은 색 광물이 마치 사람의 눈처럼 둥글게 모인 안구상 구조 등을 볼 수 있다. 색의 대조가 뚜렷해 쉬이 알아볼 수 있는 편이다.


대진항 북방파제의 북쪽에는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솟은 맞배지붕의 전각이 있다. 구한말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가 목숨을 끊은 벽산 김도현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선생은 1852년 7월14일 영양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 자는 명옥(明玉)이다. 아버지는 참봉 김성하이며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처형됐던 백촌 김문기의 14세손이다.


벽산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병서를 주야로 탐독했고 1894년 동학군이 봉기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향리의 동지와 점고회(點考會)를 조직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벽산은 가재를 털어 봉화 청량산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벽산이 이끄는 영양 의병은 곧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을 꾸리고 3월에는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선생은 자신의 집 뒷산에 성을 쌓아 본진으로 삼고 진영을 재편해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가 이끄는 의병진은 열등한 무기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896년 10월, 조정의 명으로 의병은 해산됐다. 벽산은 의병진을 해체하고 은거했지만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1906년에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는다. '밀칙으로 경에게 분격장군을 내리고 겸해 은밀히 효유하노라. 경은 모름지기 우리 선왕들을 은혜롭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의로운 군대를 고무해 먼저 도적들을 피곤하게 하고 간흉을 제거해 나라의 원수를 물리치도록 하라!'


벽산은 거병을 준비하던 중 체포돼 옥고를 치렀고,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해 교육을 통한 구국의지를 펴기도 했다. 그러던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914년 7월, 자신을 후원하고 지지했던 아버지의 상례를 마무리 지은 후 시를 지어 뜻을 밝혔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 둔 땅이 없구나'


영덕 대진리의 도해단은 구한말 벽산 의병장 김도현의 항일 의병 활동을 기리고, 그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도해'는 '바다를 밟는다'는 뜻으로, 절개와 지조를 지킴을 의미한다.

영덕 대진리의 도해단은 구한말 벽산 의병장 김도현의 항일 의병 활동을 기리고, 그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도해'는 '바다를 밟는다'는 뜻으로, 절개와 지조를 지킴을 의미한다.

도해단 전각 안 비석. '천추대의(千秋大義)' 네 글자는 1971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천 년에 빛나는 큰 뜻'이라는 의미다.

도해단 전각 안 비석. '천추대의(千秋大義)' 네 글자는 1971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천 년에 빛나는 큰 뜻'이라는 의미다.

1914년 음력 11월7일 동짓날, 벽산은 창수령을 넘어 대진 앞바다에 이르렀다. 산수암(山水岩)에서 유서 한 통을 바위 위에 놓고 바닷가로 나가 상복과 신발을 벗어 접어놓은 뒤 옷깃을 여미고 몸을 단정히 했다. 벽산은 상중에 쓰는 대지팡이를 짚고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파도의 가운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나루터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서 시신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벽산의 나이 63세였다.


전각은 도해단(蹈海壇)이다. '도해'는 '바다를 밟는다'는 뜻으로 절개와 지조를 지킴을 의미한다. 도해비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썼고 전각 안 비석의 '천추대의(千秋大義)' 네 글자는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다. '천 년에 빛나는 큰 뜻'이라는 의미다.


◆대진해수욕장


벽산 도해단의 북쪽이 대진 해수욕장이다. 길이 8㎞, 폭 100m의 백사장 뒤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장관이다. 또한 수심이 1~2m 정도로 깊지 않고 경사도 완만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당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백사장을 가로질러 낮게 흐르는 폭 200m의 송천이고, 또 백사장 곁에 높이 솟은 관어대다. 어느 겨울 그 높음과 낮음의 가운데에서 오래 바라본 대진의 바다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에서 주인공 영훈은 창수령을 넘어 송천을 따라 대진 해변까지 왔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돌연한 네 부름은 어찌 그렇게도 강렬했던지'


환갑이 넘은 벽산은 창수령을 넘어 대진에 도착해 절명시를 남겼다. 그 마지막은 이렇다.


'희고도 또 흰 바다 그 깊이 천 길이니/ 이 한 몸 간직하기 넉넉하고 남겠네'


블루로드 6코스는 관어대에서 대진해수욕장으로 곧장 내려서는 코스다. 블루로드 C코스는 축산항에서 출발해 괴시리 마을, 대진항, 도해단, 대진해수욕장을 거쳐 고래불 해안으로 이어진다. 두 코스 모두 내심 아쉬운 부분이 있다 보니 혹 6코스를 선택했다면 도해단과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과 영해만세시장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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