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석 시인
#수박
수박은 여름의 대표 과일이다.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사 먹던 과일이었다. 레드벨벳의 미니 앨범 'The Red Summer' 에 나오는 빨간 맛 과일이 바로 수박이다. 우리와 친근한 여름 수박을 노래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 먹기가 크게 부담되는 과일로 바뀌었다. 유독 비싼 값 때문이다.
수박은 오래 전부터 서과(西瓜)라 불리어 온 우리 민족과 친숙한 과일이다. 원산지는 아프리카 북동부 사하라사막 지역. 한반도에는 고려 시대에 전래되었다. 원 간섭기에 홍차구가 개경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우리 돈 5천 원권 뒷면에 그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도 수박이 그려져 있다. 현재 수박 산지로는 경북 영주시, 고령군, 성주군, 충남 부여군, 논산시, 전북 고창군, 경남 함안군, 충북 진천군 덕산읍, 음성군 맹동면, 청주시 오송읍, 세종시 연동면 등이 꼽힌다. 고온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수박이 당도가 더 높고 속이 더 실하단다.
2011년 전국 수박생산자협의회가 8월 3일을 수박의 날로 제정한 것도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이면서 서민들과 친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8과 3이라는 숫자의 모양이 각각 수박을 세로로 자른 단면(타원형)과 가로로 자른 단면(반달형)을 닮았다고 보고 수박 철에 맞추어 정한 것이다. 물론 수박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을 터이다. 이날 '수박 빨리 먹기 대회'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수박은 친지나 친척들을 방문할 때 으레 선물로 들고 갔던 과일이다. 여름 선물로는 수박만 한 게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큼지막하면서도 속이 푸짐하여 여럿이서 '잔치처럼' 둘러앉아 먹을 수 있었기에 수박은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문득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라고 한 허수경 시인의 수박 예찬이 떠오른다. 수박이 '땅의 열매'이기에 시인은 '수박 한 통 사 들고 돌아오는 저물어가는 저녁'을 땅을 안은 기분이라 했다. '수박 속에 든 수많은 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수박이 서민의 삶과 친근한 과일임이 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지금 수박은 그야말로 금값이 됐다. 수박 한 통에 3만 원대를 호가하더니, 어느새 4만 원을 넘어선다. 마트에 가서 수박을 들여다보는 서민들의 눈들이 저릴 수밖에 없고, 수박으로 다가가는 손들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수박뿐만 아니다. 최근 들어 이상기온으로 부쩍 강해진 폭염과 폭우는 과일과 채소 값을 상상 이상으로 올리고 있다. 토마토는 전년 대비 40여%, 복숭아는 25% 이상 올랐다. 이에 서민들의 삶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좋아하는 과일을 제철에 맞게 사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게 무엇보다 서운한 일이다.
수박 농사 역시 달라진 날씨로 가늠이 잘 안되는 위기를 맞는 듯하다. 고창 수박은 6월부터 이어진 무더위로 일찍 농사가 끝나버렸다. 유명한 무등산 수박의 생산량도 급격하게 줄었단다. 남은 곳으로는 고지대인 전북 무주와 강원도 양구 등에서만 생산이 될 지경이다. 하우스 수박은 이미 끝물이다. 그러니 8월 수박의 달도 옛말이 되어간다. 기후변화로 5월과 6월이 제철인 초여름 과일로 바뀌고 있다. 이른 장마로 성장기 생육이 저하되어 생산이 격감함에 따라 수박값이 급등, 서민들이 쉬 손대기 어려운 '금 수박'이 되는 것이다.
#기상이변
맹더위와 물 폭탄. 올여름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한반도의 여름살이가 심상찮다. 7일 입추와 9일의 말복을 지나자 더위가 한풀 꺾이는 듯 했으나 중순으로 접어들자 다시 더위가 이어진다. 여름철 장마가 일정한 주기가 없이 들쭉날쭉하더니, 더위 역시 일정한 주기도 없이 무차별 폭력성을 드러낸다. 한증막과 물 폭탄이 서로 경쟁하듯 번갈아 닥친다. 과거에는 여름 들자 장마를 거쳐서 폭염이 왔는데, 이젠 그런 순서가 무시된 듯하다.
국지적으로 엄청난 비를 뿌려 수해를 크게 입힌 장마 후 한반도를 달궜던 폭염이 다소 주춤해지려니 했는데, 대기 중 수증기량이 많아 체감온도는 여전히 높다. 광복절인 15일을 기점으로 전국이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권에 들면서 다시 폭염이 찾아오는 낌새를 보인다.
이상 기후는 통계상으로도 뚜렷이 나타난다. 기상청 자동기상관측장비(AWS) 관측 기록에 따르면, 올여름 1시간 강수량이 100㎜ 이상 기록된 것은 7월 4번, 8월 9번 등 총 13번이었다. 종래에는 없었던 현상이 한꺼번에 닥친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200년과 15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비가 왔다고 비명을 지른다. 기상이변은 전 세계적이다. 최근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미국 텍사스의 홍수와 폭염 등 지구촌 곳곳이 기상이변에 시달리고 있다. 사상 최고치에 이른 이산화탄소 농도 등으로 인한 현상이다.
이상 기후는, 과일과 채소 등의 물가 상승을 넘어 삶 전반에 걸쳐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밥상의 표정까지 바꿔 놓는 상태다. 농작물 생산량의 감소가 문제다. 현재와 같은 탄소 배출 추세가 이어질 경우, 2100년에는 작물 생산량이 지역에 따라 최대 40% 감소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이런 데다, 올여름엔 특히 더욱 심해진 집중호우, 폭염, 태풍 등으로 농가 피해가 커서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농업재해 종합대책'을 추진하는 지자체들도 나타난다. 8월과 9월을 '농업재해 중점 관리 기간'으로 정하고 행정력과 현장 인력을 총동원해 농업재해 예방과 신속한 현장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그래, 무엇보다 식량 안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 전체에 걸쳐 식량 가격의 상승과 영양실조 증가, 삶의 질 저하 및 가계 소득 악화라는 감당하기 힘든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는 전망이 계속 나온다. 이래저래 우리의 여름살이가 힘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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