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죠셉 초이 작가가 경주솔거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경주솔거미술관은 오는 9월21일까지 미술관 내 박대성 1~3관에서 재불(在佛) 화가 죠셉 초이(Joseph Choi) 기획전 '기억의 지층, 경계를 넘는 시선'을 개최한다.
대구 윤선갤러리와의 협업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죠셉 초이 작가가 지난 수십 년간 프랑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탐구해온 무의식과 기억의 세계를 100여 점의 회화 및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죠셉 초이 작가에게 있어 이번 전시작들은 '불면증'에서 시작된 '필연적 탐험'의 결과물이다. 그는 불면증을 겪으며 잠들기 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의 파편들이 스스로 형상을 이루는 과정에 주목했다. 낮에 작업했던 부분, 오래된 기억, 우연적인 선들이 뒤섞이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을 '움직이는 우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죠셉 초이(Joseph Choi) 기획전 '기억의 지층, 경계를 넘는 시선'展이 열리고 있는 경주솔거미술관 전시장 전경.<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죠셉 초이 'The scene'.<윤선갤러리 제공>
그는 "우리가 교육을 통해 익숙해진 계산적이고 계획된 방식이 아닌, 무의식에서 나오는 자유로움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창작의 동기"라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실 때도 어떤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결과 캔버스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점을 찍으며 기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전시작 상당수는 작가 내면의 무의식을 시각화한 동시에,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숨어있는 코드'를 담고 있다. 작가는 작품 속 상징물들이 자유로운 표현 속에서 의도치 않게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종교화에서 축복의 의미로 쓰이던 손동작이나,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한 나르키소스 신화 속 거울의 상징이 그의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경주솔거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죠셉 초이 작가의 작업 구상 스케치.<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스케치-파스텔-유화'로 이어지는 죠셉 초이 작가의 3단계 작업 중 파스텔 작품들.<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죠셉 초이 작가가 경주솔거미술관에 전시 중인 자신의 스케치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스케치-파스텔-유화'로 이어지는 죠셉 초이 작가의 3단계의 작업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백지에 선을 긋고, 지하철에서 본 여인의 손 같은 일상 속 소스들을 무의식적으로 모아 데생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파스텔로 색을 입히는데, 이 역시 계산된 색이 아닌 '느낌'으로 칠해진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완성된 두 단계를 거쳐 비로소 최종 유화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무의식과 직관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시명에 포함된 '경계를 넘는 시선'은 작가 자신의 삶과 직결된다. 1992년 프랑스에 정착한 그는 한국에선 '외국인'처럼 느꼈고, 프랑스에서는 '영원한 한국인'으로 인식되는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경계인'으로서의 경험이 작가의 작업에 깊이 반영됐다. 두 문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놓이게 된 환경이 작품 탄생의 배경이 된 것이다.

죠셉 초이 'Red figure with a cane'.<윤선갤러리 제공>

죠셉 초이(Joseph Choi) 기획전 '기억의 지층, 경계를 넘는 시선'展이 열리고 있는 경주솔거미술관 전시장 전경.<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죠셉 초이의 작품은 '정제된 절제'와 '사유의 여백'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복잡한 대상을 모노톤으로 표현한 것을 '여백'의 한 예시로 들며, "복잡하지만 심플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신비로운 상상의 여지를 주는 풍경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뒤편의 풍경처럼, 인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관람객에게 사유의 여백을 남기는 방식이다.
죠셉 초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거창하거나 심오한 메시지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관람객들이 그림을 보며 자신들의 경험과 심리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경험의 파편들을 그림 속에서 발견하고, 자유롭게 느껴보기를 원했다.
끝으로 죠셉 초이 작가는 향후 계획에 대해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보다, 내 감정이 녹아든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향후 보다 더 입체적인 작업에도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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