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건 경제전문기자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배터리 공장 공사 현장에서 475명이 불법 고용 단속에 적발되며 대규모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각)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주도로 이뤄진 단속에서 구금된 인원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 국적 협력사 직원으로 알려졌다. 한국 기업이 미국 현지에 수십억달러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그 공사를 위해 입국한 한국인 근로자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다소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복잡한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전자여행허가제(ESTA) 남용이다. 원래 90일 이내의 관광과 출장만 허용되는 제도를 한국 기업들이 공장 건설과 운영 지원 인력 파견에 활용해 온 것이다. 엔지니어들이 현지 숙소에 머물며 장비 세팅과 생산 라인 점검을 하면서 ESTA는 사실상 '단기 근무 비자'로 쓰였고, 미 당국은 이들이 공장 인근에서 장기간 체류한 기록 등을 근거로 적발에 나섰다. 문제는 주요 대기업조차 ESTA 의존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문직 취업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 E-2), 단기 상용 비자(B1)는 발급 절차가 까다롭고 거절률이 높은 데다 대기 기간만 수개월에 달하기 때문에 긴급히 투입해야 할 엔지니어를 제 때 보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기업들은 편법임을 알면서도 ESTA를 이용한 파견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미국 공장 건설에 투입되는 한국 기업의 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본사 엔지니어, 그리고 용접과 설비 설치를 담당하는 하청업체 직원이다. 본사 엔지니어들도 불가피하게 ESTA를 쓰지만 삼성전자처럼 '2주 이상 체류 금지' 지침을 두는 등 비교적 조심스럽게 운영해 왔다. 반면, 하도급업체 인력은 공사와 장비 세팅이 끝날 때까지 장기간 상주해야 하므로 ESTA 체류 허용 기간인 90일을 사실상 꽉 채워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단속에서 대량 적발된 것도 대부분 이들 하도급업체 인력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미국에 1천500억달러 이상의 투자를 약속한 바로 현재 시점에 미국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에 나선 배경에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트럼프 재선 이후 백악관은 '미국 우선 고용(American Jobs First)' 과 제조업 일자리 창출을 핵심 공약으로 삼아왔다. 미국인을 고용하고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현지 공장을 짓는 것인데, 정작 건설 인력을 ESTA로 들어온 한국인 근로자들이 채운다면 정치적으로는 모순이 된다. 이전까지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의 ESTA 남용에 추후 해당 인원의 비자 발급 불허 등 수동적인 조치로만 대응해 왔다. 그래서 미국 정부의 이번 대량 단속은 "투자는 환영하지만, 편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시범적 경고로 해석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식 취업비자(H-1B, L-1, E-2, B1 등)를 받아서는 제 때 공사 현장에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한국 기업들의 상황을 모를리 없다. 오히려 다 알고도 강하게 단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다. 하나는 미국 내에서 자신이 미국인의 고용을 지키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기업을 향해 "편법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미국 이민법을 존중하라" 고 말하는 압박 신호이다.
향후 전망은 어떨까. 한국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제한적이다. 비자 문제는 국제법적 주권 행사에 해당하며 FTA(자유무역협정)와 연계된 전용 취업비자 쿼터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앞으로의 전개는 한국 기업들에게 결코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단기적으로는 공사 지연과 비용 상승이 불가피하고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고용 확대와 현지화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 정부의 외교적 협의나 업계의 로비가 일시적 숨통을 틔울 수는 있겠지만, 구조적으로는 '미국인 일자리 우선'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기업들이 이제는 편법이 아닌, 아예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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