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 펴낸 정호승 시인 “실패·어리석음이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가치”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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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1 17:01  |  발행일 2025-09-11
열다섯 번째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을 펴낸 정호승 시인이 지난 2일 대구 정호승문학관 앞에 서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별과 죽음, 패배의 본질을 일상적 순간에서 포착한다. <사진=조현희기자>

열다섯 번째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을 펴낸 정호승 시인이 지난 2일 대구 정호승문학관 앞에 서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별과 죽음, 패배의 본질을 일상적 순간에서 포착한다. <사진=조현희기자>

'범어천의 시인' '대구의 시인' 정호승이 열다섯 번째 시집을 펴냈다. 세상의 승자독식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편의점에서 잠깐'이다. 한평생 인간의 고통을 껴안으며 사랑을 노래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이별과 죽음, 패배의 본질을 일상적 순간에서 포착한다. 그가 자라온 대구 범어동에 위치한, 그의 이름을 딴 정호승문학관에서 지난 2일 시인을 만났다.


▶이번 시집 출간에 대한 기쁨이 여느 때보다 큰 듯하다.


"제 나이가 75세다. 노년임에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아직 시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절대자가 아직 시를 통해 나를 사랑하시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시인은 가톨릭 신자다). 저번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가 2022년에 나왔다. 등단 50주년을 맞아 120편 가까이 담았다. 그런데 이번 시집도 125편을 수록했다. 더이상 시를 쓰기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또 낼 수 있게 돼 참으로 감사하다."


▶표제시 '편의점에서 잠깐'을 보면 편의점이란 공간에서 이별한 남녀가 나온다.


"편의점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다. 저 또한 자주 가는데, 어느 날 이별한 연인이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나는 서사를 생각했다. 그 만남의 순간은 어떤 시적 상징성과 의미를 띨까 고민하며 쓴 시다. 편의점은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다. 그 거래를 사랑에 빗댔다. 누구보다 사랑한 지난 날의 사람을 '계산'하며 그 사랑의 의미를 다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익을 남기는 게 아니라는 의미를 전하려 했다."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잠깐 중)


▶"패배가 고맙다"(패배에 대하여) "어리석음은 나를 현명하게 한다"(어리석음에 대하여) 등 역설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삶을 돌아보면 성공보다는 실패, 승리보다는 패배, 현명함보다는 어리석음이 더 많았다. 무엇을 얻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이 더 많았다. 젊을 때는 그것들이 가치 없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깨닫는다. 젊을 때는 승리나 성취가 삶의 활력을 주겠지만, 노년에는 그것을 끝내 얻겠다고 매달리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느낀다."


편의점에서 잠깐/정호승 지음/창비/200쪽/1만3천원

편의점에서 잠깐/정호승 지음/창비/200쪽/1만3천원

▶이번 시집에도 전태일 열사에 관한 시(눈사람)가 담겼다. 오래 전부터 전태일 열사께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전태일 열사는 저와 나이도 비슷하고, 대구 사람이기도 하다. 저는 전태일 열사를 저와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전태일 평전'에서 그의 유언을 읽어보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성인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 시에서 전태일 열사는 '영원히 녹지 않는 눈사람'이다. 불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다."


▶이 시집이 독자들에게 "수선화가 되길 바란다"고 하셨다. "사랑이 결핍되고 증오가 팽배한 이 시대"(시인의 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시는 사물이나 현상을 본질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단순히 존재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와 효용을 주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올 여름만 해도 우리는 나무 없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무가 우리를 위하고 사랑해주는 존재인 것처럼, 시 또한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나무와 같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삶, 눈물, 고통, 절망 같은 것들을 위로해주는 시를 쓰려 노력한다.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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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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