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 길을 걷다] 경남 거창 창포원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 |
  • 입력 2025-09-25 14:33  |  발행일 2025-09-25
경남 거창 창포원의 버드나무길. 여기저기 수양버들도 보였다.

경남 거창 창포원의 버드나무길. 여기저기 수양버들도 보였다.

그곳은 이전에 황강 상류였다. 장마가 지면 범람하고 물이 빠지면 잡쓰레기 너절한 버린 땅이었다. 국가하천인 이 불모의 강변에 2014년부터 수변생태정원을 조성, 2017년 정식 개장되었다. 거창 창포원이다. 민무늬 햇살이 생태정원에 그물처럼 퍼지자 푸른 나무와 꽃 수생식물이 맵시를 고친다. 하늘은 그지없이 맑았고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들어가면서 힐긋 보이는 나무들이 싱그러워 숨이 편해진다. 사람은 나무 안에서 살았다. 나무 없는 사막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듯이.


거창 창포원 열대식물원. 190종 4천500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거창 창포원 열대식물원. 190종 4천500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창포원 열대식물원 내 난초원 구역의 선인장들.

창포원 열대식물원 내 난초원 구역의 선인장들.

초입에 있는 돔 건축미가 아름다운 열대식물원을 둘러본다. 아열대원·지중해·선인장·난초·유실수·온대식물원 6개 구역에 190종 4천500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고 꽃나무 향기가 실내를 잔뜩 채워 오감을 감미롭게 한다. 실내길로 걷는 데 큰 키 나무에 빨간 꽃이 피어 있는 히비스커스가 있다. 꽃잎으로 차를 만드는 히비스커스. 시큼한 맛에 루비색을 넘어 핏빛으로 우러나는 찻물은 디저트와 우울증에 좋다는 유명 차다. 나무 아래에는 하얀 스파티필름 꽃이, 그 옆에 각색의 임파첸스가 활짝 피어 있다. 두 군데 인공 폭포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온실의 더위를 식히고 있다. 우리 키를 훌쩍 넘어서는 바나나 나무가 남쪽 나라 이미지로 이국적이다. 빨간 안스리움 꽃이 간들간들 무척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특이한 형태의 꽃기린 선인장과 품격이 높은 난초 호접란 틸란드시아 앞에 머물면서 하나로 이어져 있는 생명의 긴 끈을 느꼈다. 열대식물원은 천국이 이런 곳일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떠올리게 했다.


바깥으로 나간다. 거기에도 긴 줄 화분 란타나꽃. 다른 화분에 안젤로니아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마음 빈 곳은 꽃들로 가득 찬다. 수국원을 지난다. 하얀 나무수국들이 흰 자작나무와 겹쳐 보인다. 리틀 라임, 라일락, 떡갈잎수국과 이름 모를 꽃들도 여기저기 왕창왕창 피어 있다. 꽃 한 송이 떨어져도 상처받는 이 가슴에 무진장 피는 기억의 꽃밭. 아득한 날부터 내 안에 숨어 있는 꽃들이 이제 나타나 이 꽃들과 어울려 화원을 이루고 거기를 거니는 내 영혼을 본다. 초록 아치 길을 지나고 수생식물원으로 간다. 수서곤충이 있고 파피루스, 물양귀비, 물칸나가 다정하게 공생하고 있다. 잔잔하고 고요한 연못의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물에 비치는 나를 연못이 만지고 있다. 여기서는 정말 나를 스쳐 가는 시간의 수레바퀴를 세우고 싶다. 그러나 그게 안 된다.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시간의 먹이가 되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간 억눌렀던 욕심을 자꾸자꾸 털어 내고 몸이 허공과 하나가 되면 들꽃이 되고 바람이 될 거다.


거창 창포원의 연꽃원. 잔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창 창포원의 연꽃원. 잔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향을 돌린다. 곁에 꽃창포습지가 있다. 이곳도 연못이다. 공중에서 떨어진 비(雨)의 울음이 땅에 고여 연못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속 새, 물억새, 무늬 물대와 노랑꽃 창포, 붓꽃, 엔타사 아이리스와 알 수 없는 학명의 숱한 수생식물군이 가득 자라고 있다. 푸르게 빛나는 연못에는 수많은 네가 피었다 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이곳은 물비린내 나는 자연의 신비다. 물속에 뿌리를 내린 맨발과 염색 안 된 손마다 깊은 침묵을 쥔 수서 식물은 무시로 필사하는 기도문이다.


작은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이팝습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회갈색 가지에 난형의 꽃잎. 흰 쌀밥처럼 보이는 이팝나무꽃. 향긋한 향기. 뜸 잘든 밥알 같은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말은 부모의 사랑, 기쁨, 자기 향상이다. 이팝나무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춘궁기에 먹지 못해 죽은 아이의 무덤에 쌀밥 같은 이팝나무를 심어 아이의 한을 달랬다는 전설이다.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담은 슬픈 서정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경남 거창 창포원의 산책로 코스.

경남 거창 창포원의 산책로 코스.

걸음을 떼자 왕버들 생태숲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수양버들도 보인다. 왕버들은 긴 팔을 뻗어 그늘을 내어주고 둥치는 비스듬해 운치가 넘친다. 주로 물가에서 자생하며 물 자국 자리가 허멀건 밑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왕버들이 물에 반영되어 예쁜 그림을 그린다. 연둣빛 실 같은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가늘고 축축 늘어진 가지가 작은 바람에도 하느작거리면 머릿속에 어릴 적 고향의 추억들이 첨벙거린다. 수양버들 춤추던 고향의 냇가 둑을 걷듯이 과거로 돌아가 걷는다. 곧 황강이다. 저 강은 언제까지 저렇게 흘러갈까. 어제 흘러간 강물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흰 줄무늬 갈대가 서걱인다. 마름 나리가 수면에 데칼코마니를 만든다. 연두색에 이르도록 쏟지 못한 애잔한 꽃말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세월 따라 흘러가는 서러운 황강. 저 들판, 저 산, 그 너머 산, 그 위로 보이는 허공으로 흘러가는 황강은 너무 슬프다. 시작도 끝도 모르지만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황강의 뒷모습은 애절한 그리움이다.


창포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강과 산야. 사방이 평지라서 그런지 조망의 가시거리가 환상이 된다.

창포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강과 산야. 사방이 평지라서 그런지 조망의 가시거리가 환상이 된다.

강 저편에 하늬바람 섬이 있다. 낙우송 섬도 있다. 섬 쪽으로 걷는다. 물 냄새와 퇴적 흙냄새가 썩인 바람이 불어온다. 작은 토우 같은 섬이 더 은은히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섬이라기보다 꿈꾸는 모든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기착지다. 아치형 다리를 건넌다. 바람의 섬이라 그런지 바람결에 파르르 떨리는 나뭇잎이 리듬을 탄다. 사방에 꽃나무가 무성하고 내면의 순례처럼 걷는 섬의 길은 잡생각을 지우는 망각의 길이기도 하다. 근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거였다. "아자씨 질 조깐 물어 봅시다." 중년의 부부인 듯한데 남자가 입을 뗀 것이다. "그렁마요." 나도 전라도 탯말로 대꾸했다. "우린 광주에서 왔는디 거창에 존 귀경거리 있으면 야그 좀 해주시씨요 이" 한다. "여기는요. 수승대가 가 볼 만혀요. 그라고 금원산 폭포도 마니 찾는디요. 네비따라 가면 되겠소이." "하이고오. 으차끄나 이참에 존 귀경하게 되었지라우, 을매나 고맙소이 이."


그들은 떠나가고 나는 또 다리를 건너 낙우송 섬으로 간다. 섬과 섬은 감정 밑바닥 그 어딘가에 항상 떠 있다. 이렇게 다리를 건너 섬에서 담방거리며 걷다가 또 다른 섬으로 걸어가는 나는 섬의 인형이 되어 강 위로 드리워진다. 누구라도 섬을 떠날 길 싫어한다. 거기서 디딘 발걸음 어느 것도 잊지 못할 여로가 된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떠밀어 낸다. 인근 황강 전망대로 향한다. 꽃나무 사이로 "누가 꽃이게" 글이 보인다. "꽃이 피니 나도 좋다"는 문장도 있다. 그러나 꽃 구경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 어려운 감성의 여운이 넘실거린다. 전망대 동산 가는 길 양쪽에 작약이 무성하다. 달팽이 모형을 본떠 만든 오르막길은 우리의 동화이고 속삭임이다. 길 외는 전부 꽃잔디로 에워싼 전망대 정원은 너랑 나랑 쉬엄쉬엄 오를 수 있는 꽃길이다.


정원의 동산 높이가 70m 전망대 높이가 34.7m인 전망대에 선다. 사방이 평지라서 그런지 조망의 가시거리가 환상이 되는 뷰 포인트다. 세상을 다 덮을 것 같은 초목이 눈동자까지 푸르게 시침질 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산야가 참으로 아득하다. 농부의 땀과 정성으로 자라는 논의 벼도 그렇지만 실핏줄처럼 흐르는 황강은 유년을 그려보는 나를 탈바꿈시킨다. 어떡하나, 나의 감정은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어떤 곳을 향해 떠나고 있다는 것을.


글=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장병선 여행사진작가·범어교회 협동 장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