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보는 창]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구조, 스페인 노동시장의 역설

  • 최지윤 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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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02 10:15  |  발행일 2025-10-02
당직 시간의 연금 반영과 강제 당직 축소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에 나선 스페인 의사들. <출처: EI Confidencial>

당직 시간의 연금 반영과 강제 당직 축소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에 나선 스페인 의사들. <출처: EI Confidencial>

그 나라에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무엇인지, 실제 경제지표는 어떻게 파악하는지, 우리나라에 반영이 가능한 정책 성공사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이다. 경북PRIDE기업 CEO협회는 지역 기업들의 해외시장 조사 및 정보 수집을 돕기 위해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스를 구축했다. 이들은 현지의 시장 상황 및 산업 분석, 주요 이슈와 같은 양질의 시장 정보를 지역 기업들을 위해 전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지역 기업만이 아닌 지역민 전체를 위해 블로그나 페이스북보다 더 친절하고, 학술지나 논문보다 정확한 해외 정보를 매월 1회 지면을 통해 전달할 예정이다.


2000년 이후 스페인의 최저임금(SMI) 상승 추이. <출처: 스페인 노동 및 사회경제부, EI economista>

2000년 이후 스페인의 최저임금(SMI) 상승 추이. <출처: 스페인 노동 및 사회경제부, EI economista>

최근 스페인에서는 식당, 카페, 기업, 병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구인난이 지속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한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핵심적인 원인은 일을 해도 삶의 여건이 나아지지 않는 구조에 있다. 2025년 기준 스페인의 최저임금(SMI)은 약 1천184유로(약 207만1천500원)다.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원룸 하나를 임대하려면 평균적으로 1천100유로(약 165만원)가 필요하다. 즉, 최저임금으로는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지만, 임금 인상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25년 6월 기준 스페인과 한국의 빅맥 세트 가격. 스페인(왼쪽)이 한국보다 약 5천원 비싸다. <왼쪽: 스페인 Glovo, 오른쪽: 한국 배달의민족 캡처>

2025년 6월 기준 스페인과 한국의 빅맥 세트 가격. 스페인(왼쪽)이 한국보다 약 5천원 비싸다. <왼쪽: 스페인 Glovo, 오른쪽: 한국 배달의민족 캡처>

여기에 고용 형태도 불안정하다. 계약 기간이 짧고, 근무 시간도 들쑥날쑥한 일자리가 많다. 서비스업의 경우 주말이나 야간 근무가 기본인데, 이러한 일은 장기간 지속하기도 어렵고 미래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 결과 청년들이 이러한 일자리를 기피하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부담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임금 구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몇 년간 스페인의 최저임금은 빠른 속도로 인상돼 왔다. 2018년 SMI는 월 735.9유로였으나, 2024년에는 1천134유로, 2025년에는 1천184유로로 상승했다. 6년간 약 60%에 달하는 인상률은 표면적으로는 스페인 정부의 적극적인 분배 정책의 성과로 보일 수 있다.


2018~2023년 EU  회원국들의 GDP 대비 조세 부담 비율 변화. <Instituto juan de Mariana, 2025년 4월 보고서>

2018~2023년 EU 회원국들의 GDP 대비 조세 부담 비율 변화.

그러나 이러한 숫자만으로 노동자의 실질적인 삶의 질이 개선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기간 동안 물가는 급격히 상승했고, 특히 주거비·식료품비·에너지 비용 등 생계비 전반이 실제 임금 인상 폭을 상쇄했다.


스페인에서 최근 몇 년간 시민들이 크게 체감한 변화 중 하나는 생활비 급등과 함께 세금 부담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사이트 '이데알리스타(idealista)'에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은 최근 몇 년 사이 유럽 국가들 가운데 세금 부담이 가장 빠르게 증가한 상위 3개국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총리 취임 이후를 기준으로 계산할 경우, 스페인 국민은 1인당 연간 2천627유로를 더 부담하게 되었고, 이를 물가상승률(IPC)을 반영한 실질 기준으로 환산해도 1천223유로 증가했다.


국민당에 따르면 페드로 산체스 정부가 들어선 2018년 이후 스페인에서는 총 97건의 세금 및 사회보장 기여금 인상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행됐다는 점이다.


명목세율은 그대로지만, 실질 부담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세금이 많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복잡한 세금 구조, 계속 오르는 생활비, 그리고 정부가 내놓는 설명이 현실 체감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겹치면서 현재 스페인의 서민과 중산층은 막연한 불만이 아닌 수치로 확인되는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야당인 국민당은 정부의 조세 정책이 중하위 계층의 소비 여력을 줄이고 있다며 세제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 유로존, 미국 식품 제조업 산업물가지수 추이. <출처: 스페인 중앙은행>

스페인, 유로존, 미국 식품 제조업 산업물가지수 추이. <출처: 스페인 중앙은행>

국민당이 국회에 제출한 제안서에 따르면, 현재 스페인 국민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이유는 소비가 늘어서가 아니라, 예전과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3년간 소비자 물가는 평균 20.5% 상승했으며, 식료품 가격은 무려 37.3%나 올랐다. 임금이 상승했음에도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 때문이다. 일하면 할수록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구조, 이것이 지금 스페인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이다.


실제 수치를 살펴보면 그 흐름은 더욱 분명하다. 스페인 중앙은행에 따르면, IRPF 실효세율은 2019년 12.8%에서 2023년 14.7%로 상승했다. 소득이 그대로인 상황에서도 세율이 올라가면서, 중산층 이하의 소비 여력이 크게 위축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는 전문직 종사자의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이다. 지난 15년간 생활비가 빠르게 상승하는 동안, 공공병원 의사들의 임금은 거의 제자리걸음이고 이로 인해 많은 의료인이 삶의 질 저하와 생계 압박을 호소하고 있다. 국가통계청(INE)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물가는 36.6% 상승한 반면, 같은 기간 의사의 평균 임금 상승률은 고작 10%에 그쳤다.


교사와 교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9년부터 2024년까지 공립학교 교사의 임금은 겨우 14.5%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반 노동자의 임금은 30% 넘게 올랐지만, 유독 교사의 임금은 제자리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이 누적되자 교사들이 교육 현장을 떠나는 일이 잦아지고 있으며, 특히 중학교(ESO)와 직업교육(FP) 부문에서는 교사 자격증 없이 교단에 서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스페인은 2023년 3월 '스페인 대학기본법(LOSU)'을 통해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오랜 과제로 지적돼 온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대학 현장은 기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시간강사(asociado)를 줄이고 정규직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은, 이름만 바뀐 또 다른 불안정 고용 형태, 즉 '대체 교수(profesor sustituto)'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체 교수는 병가, 연구년, 수업 시수 조정 등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단기 계약직으로 채용되며, 계약 기간은 짧고 업무 범위는 불분명하며, 심지어는 계약서 없이 강의를 시작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스페인 대학에서는 정규직이 특권이 되고, 비정규직이 표준이 되는 상황이 고착화되고 있다. 2023년 기준 스페인 전체 국립대학 교수·연구 인력 14만1천887명 중 2만4천687명이 시간강사로, 전체의 17.4%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받는 보수도 문제다. 국립대학 교수의 월급은 각 대학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수가 월 2천유로(약 30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임금을 받으며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스페인 통계청(INE)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체 근로자의 39.8%가 월 2천유로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약 18%는 1천유로 이하를 받고 있다. 같은 해 평균 임금 상승률은 4.1%에 불과했으며, 이는 물가 상승 속도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2025년 기준 스페인의 세전 평균 월급은 2천290유로로, 명목상으로는 개선된 수치지만 체감은 전혀 다르다. 같은 해 평균 월세는 임금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팬데믹 이후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 가운데 스페인의 식료품 제조 물가는 유로존과 미국을 앞지르며 급등했다.


이는 서민과 중산층의 생계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수치상으로는 소득이 증가했지만, 실질적인 구매력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후퇴하였다. '월급은 오르는데 살기는 더 팍팍해진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중하위 소득층이 느끼는 압박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구조적 문제는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단순히 임금을 인상한다고 해서 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실제로 현지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 사이에서는 인건비 대비 낮은 생산성, 인력 충원의 어려움, 높은 이직률 등이 공통된 애로사항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 시장에 진출하고자 할 경우, 인건비뿐만 아니라 현지의 노동 환경과 고용제도 전반에 대한 충분한 사전 이해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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