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偶(무우)
종림(宗林) 지음/솔/200쪽/2만3천원
"나는 나를 신의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라는 충격적인 자기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한 수행자가 평생에 걸쳐 마주한 존재론적 고뇌의 기록이자 그 해답을 찾아 나선 치열한 사유의 여정이다. 저자 종림(宗林)은 세상과의 불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욕망)'과 '해야 할 것(당위)'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에서 오는 고통의 근원을 파고든다. 그 길 위에서 그는 '공(空)' 사상을 만나지만, 기존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유(有)와 무(無)'라는 이분법을 넘어 '0과 1'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시한다. '無偶 (무우)'는 '0에서 시작'하는 사유를 통해,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존재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 보이는 역작이다.
저자는 '공(空)'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학문의 개념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요소가 없는 집합인 '공집합(空集合)'을 통해 '없는 것의 있음'을 사유하고, 가로와 세로의 틀로는 셈할 수 없는 '대각선(對角線)'을 통해 존재의 나머지 부분을 탐색한다. 또한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위치 짓는 '소실점(消失点)'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적 담론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는 21세기 한국 불교의 중이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며, 한국 불교가 '본성론'이라는 틀에 갇혀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신적인 초월이나 관념의 유희에 기대지 않고, 이 땅에 발 딛고 선 수행자로서 과학적 사고와 유신론적 태도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신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모든 주어진 이념과 믿음을 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의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용기를 선사할 것이다.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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