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지난 10월25일은 청산리 전쟁 제105주년 기념일이었다. 항일 반제(反帝) 독립운동 중 부대 연합편성과 맞춤전술, 치밀한 정보전까지 더해 이긴 최고의 전투로 칭송되는 1920년 '청산리 대첩'은 4개월 전 벌어진 '봉오동 전투'와 함께 한국 무장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을 '무력으로 싸워 이긴' 독립전쟁의 상징으로 교과서에 실리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기념일을 맞아 서울에서는 관련 행사 2건이 열렸다. 오전에 '신흥무관학교 보훈 문화 대축전'이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개최됐다. 오후엔 국회의원회관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체코군단' 주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두 행사 모두 정부나 공기관이 앞장서 주최한 건 아니었다. 사단법인 등 민간단체가 열었다. 그래서일까, 행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청중이 적어 썰렁했고 언론도 외면했다.
# "나라 밖 독립운동 기지를…"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이회영·이동녕 등 신민회 간부들은 "항일전쟁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로 나라 밖에 독립기지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회영 6형제와 온 가족은 서울·양주·파주·개성 등 현 시세 2조 원대 재산을 처분,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마련하고 12월30일 야밤에 압록강을 건넜다. 당도한 곳은 만주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 작은 마을이었다.
이듬해 안동 유학자 이상룡과 의성 김동삼, 개성 이건영 등 명문가 일가친척도 온 재산을 팔아 모아 삼원보에 합류했다. 100여 가구 망명객들은 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하고 허름한 옥수수창고 일대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일본 감시를 피하려 강습소 이름을 붙였으나 사격술, 전술학, 무기학 등 군사 과목과 산악 훈련에 역사·지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수업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당시 군사훈련 교사는 김창환·이장녕 등 구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엔 민족 자강 독립 열풍이 고조되며 독립군에 자역사 지리 원하려는 지사들 발걸음도 활발해졌다. 이때쯤 중학을 거쳐 신흥무관학교로 개교하며 일본 육사 출신 지청천·김경천과 중국 무관 출신 이범석이 교관으로 합류했다. 교사도 늘어 본교 분교 형태가 됐고 1919~1920년 동안에만 약 1천, 총 3천5백여 독립군이 배출됐다. 그들은 봉오동-청산리전투 주역으로 항일전쟁 선봉에 섰다.
# 홍범도와 봉오동 대승리
1920년 전반까지 만주에는 40여 독립군 단체들이 조직돼 있었다. 이중 의병 출신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이 1919년 8월, 함남 혜산진 진공(進攻) 작전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와해한 이후 크고 작은 국내 진입 작전이 계속됐다. 화가 치민 일본은 함북 나남의 19사단에 "월강(越江) 추격대를 편성, 두만강을 건너가 독립군 근거지인 간도 화룡현 봉오동까지 쳐들어가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6월7일 새벽 일본 남양수비대와 월강 추격대가 합류, 몰래 두만강을 넘었다. 이때 독립군연합 지휘부는 정보를 미리 알고 주민을 대피시킨 뒤 봉오동 지역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포위해 매복 대기 중이었다. 점심 무렵 봉오동 계곡으로 들어서는 일본군을 독립군 소대 병력이 교전하는 척 유인해 포위망 안에 가두고 총대장 홍범도의 집중 사격 지시로 궤멸시켰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경상 300명 피해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간도 독립군의 세력 확장과 봉오동 참패에 놀란 일본은 중국 군벌에 압력을 가해 중국군을 출동시키고 그게 안 되면 일본군을 직접 동원,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정보도 미리 입수한 독립군 진영은 중국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근거지를 일본군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지린성 연길·훈춘·왕청·화룡현 일대에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각각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근처로 이동했다.
# 김좌진 홍범도 부대 연합 유격전
'간도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목을 맨 일본은 중국군 동원이 실패하자 만주 직접 침공을 위한 거짓 구실을 만들었다. 마적단을 조종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고 그 진압 명분으로 5개 사단 2만5천 병력을 동원해 섬멸 작전에 돌입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양민 피해가 불가피해 군사 충돌을 피하려던 독립군부대들이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10여 회 청산리 일원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맞부딪쳐 싸워 이긴 '유격전 모음'이 바로 청산리 대첩이다.
첫 전투는 21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백운평에서 추격하던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며 개시됐다. 지형을 이용한 매복과 고지 선점 기습으로 단숨에 국면을 바꿔 20분 만에 일본 전위부대 200명을 몰살시켰다. 일본군은 기관총 박격포 등 화력을 난사하면서도 독립군 위치를 찾지 못해 쩔쩔매다 속절없이 쓰러졌다. 자기네 시체를 엄폐물로 쌓아가며 응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패주하고 말았다.
그날 오후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과 국민회군 광복단 등 연합군이 포위 공격당하던 상황에서 오히려 적들이 서로를 쏘게 만드는 기략을 발휘해 승리한 완루구 전투가 이어졌다. 이후 김좌진 홍범도 부대는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전투에서 상호 보완 협력하며 유격전을 펼쳐 연전연승의 기록을 써 내려갔다. 역사학자 신용하는 이 승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대승리를 쟁취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동포들의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제 아들들을 독립군 병사로 바쳤고 무기 구입 등 군자금을 부담했으며 식량을 챙겨주고 끊임없이 독려했다. 또 독립군에게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우게 했으며 일본군에게는 허위정보를 주어 패전의 늪에 빠트렸다. 통신선을 끊어 일본군 작전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민과 군이 한마음으로 일구어낸 승전보였다"
그러나 앞서도 밝혔듯 이러한 대승리의 역사는 민간단체의 조촐한 기념행사 정도로 우리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스러져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실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 "보훈은 희생과 헌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자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라며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독립운동가 본인과 후손들이 가난에 찌들어 사는 걸 당장 모두 개선해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이 뿌듯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간직하며 살 수 있게 기념일 정도 챙겨주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상] 월정교 위 수놓은 한복의 향연··· 신라 왕복부터 AI 한복까지](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10/news-m.v1.20251031.6f8bf5a4fea9457483eb7a759d3496d2_P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