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9년 만에 다시 찾은 일본 국제예술제이다. 지중해에 내린 햇살 때문에 바다는 통째로 은빛 물결이었다. 공기는 청량했고 예술은 섬 곳곳에 바람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그날의 계획은 데시마에 설치된 작품을 모두 보는 것이었다. 안내 지도를 들고 부지런히 걷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반가운 목소리다. "다시 문화 산책 함께 하시죠." 9년 만의 연락이었다. 절묘하게 9라는 해수가 포개어진다. 정중한 말투 속엔 친절함이 묻어났다. "좋아요, 함께 걸어요."가 나의 대답이었다.
그동안 참 많은 길을 걸었다. 학교와 전시장, 사람과 계절을 지나며 수많은 장면과 마주하다 보면 정리되지 않은 삶의 여백은 남게 마련이다. 그날의 전화는 예술과 문화, 삶을 한 줄로 이어줄 새로운 미션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남겨진 여백을 메워줄 조용한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예술을 보기 위해 달려온 섬으로 지난 삶의 풍경도 따라왔다. 아홉 해 전의 모습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분주하던 시절, 손에는 많은 것을 쥐고 마음에는 놓지 못한 것들을 품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따라왔던 지난 삶의 풍경은 데시마에 두고 다음 날에는 다카미시마, 그다음 날에는 나오시마를 걸었다. 누군가에게 검사받을 것도 아닌데 매 순간 사진 한 장, 메모 한 줄에도 정성을 담는다. 이제는 예술을 짓거나 기획하고, 읽고, 쓰고, 나누며 누리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은빛 물결 반짝이던 바다 위로 멀리 배 떠나는 소리 들리던 데시마의 풍광을 기억한다. 그때 알았다. 삶은 돌아가는 길 위에서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잠시 숨 고르고 다시 길 나서는 망망대해 배들처럼 낯선 곳 섬마을로 예술 탐방 온 세계인들의 열정이 아름답다.
그들처럼 나도 아름다운 산책을 하고 싶다. 2025년의 마지막 두 달이 특별한 계절이 될 것 같은 이유이다. 오늘도 여유롭게 문화·예술의 산책을 나선다. 산책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의미 있게 나를 불러준다면 나는 또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좋아요, 함께 걸어요."라고.
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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