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 우거진 계곡에 터잡은 사찰
신라 진덕여왕때 의상대사가 창건
동해일원의 최대 비구니 참선도량
불영계곡 맑은 물 울창한 소나무숲
자연 곁에 마음의 평화와 여유 느껴
사찰 종소리·바람 모두 부처의 언어
바쁜 일상 세속의 혼탁한 물결 속
절을 찾는 일은 마음을 닦는 행위
"'길의 문화'는 기억을 낳고, '도로의 문화'는 망각을 낳는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그는 현대 문명을 두 가지로 나눠 성찰했다. 길은 비포장과 굽이침, 우회를 즐긴다. 길에서는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삶의 리듬이 되고, 주기적인 되돌아봄과 상호 양보, 비켜섬이 미덕으로 중시된다. '길의 문화'는 여정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며, 길섶의 풍경과 마음의 호흡을 귀하게 여긴다.
'도로의 문화'는 속도와 효율, 실용과 목적을 중시한다. 도로는 곧고 넓어야 하며 시간 단축을 이상으로 삼는다. 포장도로와 터널은 도로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도로 위의 인간'은 목적지만 바라보며 이동 과정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사유의 깊이를 놓친다. 쿤데라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이제 더 이상 '길 위의 존재'가 아니라 '속도에 중독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길 위에서 참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길의 문화는 느림과 사색, 만남과 머무름의 정신을 실현하는 인간적인 철학이다.
울진 불영사의 돌거북. 불영사로 향하는 산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마음을 닦고 비추는 구도의 여정이다. 깨달음은 도착의 순간에 있지 않다. 속도를 내려놓고 길을 생각하는 느린 걸음이 거북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길 위의 수행, 마음의 등을 밝히다
'도로의 문화'가 강요하는 속도를 내려놓고 '길의 문화'를 생각하며 불영사로 향한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일주문을 지나 20분 남짓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걷는다. 계곡의 물소리와 솔바람에 서걱이는 나뭇잎 소리에 호흡을 맞추면, 들숨과 날숨, 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마음은 모든 길의 근원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걸음도 맑아진다." 불교 경전 '법구경'의 한 구절이 순례자에게 길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불영사로 향하는 산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마음을 닦고 비추는 구도의 여정이다. 세속과 다른 물소리와 바람결, 벌레의 울음이 번뇌를 씻어내고, 내 안의 망상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존재하니,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 법구경의 또 다른 구절이 떠오른다. 숲과 물, 바람과 돌, 너와 내가 서로의 리듬에 기대어 존재하듯, 순례자도 자연과 호흡을 맞춘다. 구도자는 언제 도착할지를 따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마음이다. 도로의 문화가 빼앗은 마음의 여유가, 길 위의 고요와 숲의 적막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금강송이 우거진 계곡 한가운데 자리한 불영사는 651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불영사(佛影寺)'라는 이름은 냇물 위에 다섯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해서 붙여졌다.
◆천축산 품에 안긴 부처의 그림자
금강송이 우거진 계곡 한가운데 자리한 불영사는 651년(진덕여왕 5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고려시대 한림학사 유백유가 남긴 '천축산불영사기'에 사찰의 이름 '불영사(佛影寺)'와 '불귀사(佛歸寺)'가 확인된다.
불영사라는 명칭은 시냇물 위에 다섯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해서 붙여졌다. 불귀사는 의상대사가 온 세상을 다니다가 15년 만에 불영사로 돌아왔는데, 이때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와 기뻐하였다"라고 해 부처님이 돌아온 사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불영사의 연못 '불영지(佛影池)'에는 부처의 그림자가 비친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고 찾는 것이 아니다. 천 번을 찾아봐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부처의 그림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불영의 참뜻은 외부의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처의 빛을 발견하는 데 있다.
불영사는 동해 일원에서 가장 큰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울창한 솔숲과 고즈넉한 전각들이 계곡의 물소리와 어우러져 사찰의 품격을 높여준다.
◆정갈함과 깊이를 품은 비구니 도량
불영사는 수많은 스님이 수행과 정진을 이어온 동해 일원의 최대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고요 속에서도 생기가 흐르고, 단정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번진다.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괴석 사이로 계곡물이 사계절 맑게 흐른다. 물빛은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숲의 그림자와 바람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는다. 울창한 송림과 고즈넉한 전각들이 물소리와 어우러져 사찰의 품격을 더 높여준다. 바람조차 수행자의 호흡처럼 느리게 흘러 돌 하나, 잎새 한 장에도 고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불영사 삼층석탑. 불영사에는 응진전, 대웅보전, 영산회상도와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사찰에는 응진전, 대웅보전, 영산회상도, 삼층석탑, 불연과 불패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응진전은 기둥 없는 통칸 구조에 맞배지붕과 단아한 비례미를 갖췄고, 대웅보전은 팔작지붕 아래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을 모신 중심 법당이다. 의상전은 인현왕후가 꿈속에서 스님을 만나 복위(復位)를 이룬 이야기를 담은 건물로, 불영사가 왕실과 맺은 인연을 보여준다.
불영사의 진면목은 건축과 문화재에만 머물지 않는다. 수행의 마음으로 빚은 공양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절의 정신과 자연의 기운이 깃든 수행이다.
"불영사에서 공양해 보지 않은 사람은 불영사를 말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한 그릇의 음식 속에 절제와 풍요, 소박함과 깊은 맛이 담겨 있다. 예약하면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으며, 한 숟가락이 마음을 깨우는 수행의 순간이 된다.
주지 심전 일운 스님이 지은 '불영이 감춘 스님의 레시피', '김치나무에 핀 행복', '사찰 음식이 좋다' 등은 사찰 음식의 교과서로 통한다.
◆시와 전설이 머무는 공간
입구 바위에는 '단하동천(丹霞洞天)'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세상, 곧 부처의 세계를 뜻한다. 불영사와 불영계곡의 풍광은 한 폭의 불화처럼, 옛 선비와 시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시인 김창흡은 불영사를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부용꽃 천 송이 절을 둘렀는데, 금탑봉 청라봉이 날아갈 듯 솟았다. 전각 밑 용소에는 용이 숨어 있는데, 동문에 쏘이는 빛 부처님 아니신지. 계곡의 눈 녹은 물은 은빛 폭포가 되고, 이월의 봄구름이 산허리를 감싼다. 새벽녘 달빛 따라 좌망대에 오르니, 마음이 맑아져 속심이 씻긴다." 달빛과 폭포, 바람과 절벽의 그림자는 곧 '부처의 그림자'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맑게 한다.
불영계곡의 작은 폭포와 바위틈을 스치는 바람은 걷는 즐거움을 더한다. 절과 계곡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느끼게 한다.
불영사를 둘러본 뒤, 불영계곡의 맑은 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 기암절벽을 걸어보자. 곳곳의 작은 폭포와 바위틈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걷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절과 계곡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자연과 함께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길 위의 깨달음, 마음의 풍경 속으로
구도의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법구경은 "스스로 자신을 밝히는 이가 가장 훌륭한 수행자"라고 했다. 수행은 출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비추는 일이 중요하다.
세속의 삶은 자주 마음을 흐리게 한다. 바쁨과 욕심이 거울처럼 맑은 마음 위에 먼지를 쌓는다. 그래서 인간은 때때로 산과 절, 자연으로 들어가 자신을 비춰본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다.
불영사의 연못에서 산쪽을 바라보면 부처의 모습을 한 바위인 부처바위가 보인다.
절의 종소리, 숲의 바람, 계곡의 물소리는 모두 부처의 언어다. 자연은 꾸짖지 않고, 다그치지 않으며, 다만 묵묵히 우리에게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다. 바쁜 일상에서도 주기적으로 침묵과 고요에 침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불영사의 연못이 보여주듯, 세속의 혼탁한 물결 속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면 어느 순간 맑은 존재를 느끼고 확인할 수 있다. 그 맑음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절을 찾는 일은 마음을 다시 닦는 행위이자, 삶의 먼지를 씻는 의식이다.
길 위의 수행은 단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산허리를 감도는 바람과 나뭇잎의 그림자, 물가에 반짝이는 햇살, 돌 틈에서 피어난 한 송이 야생화,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 산새 소리, 그 모든 것이 수행의 벗이 된다.
걷는 동안 마음은 천천히 자신을 비춘다. 세속의 속도를 벗어나, 내면의 고요한 호흡과 만난다. 모든 발걸음이 사유가 되고, 숨결 하나하나가 명상이 된다.
불영사로 향하는 길은 '도로의 속도'에서 벗어나 '길의 순리와 여유'로 돌아가는 인간의 귀환이다. 깨달음은 도착의 순간에 있지 않다. 길 위에서 바람 한 줄기, 빛 한 조각에 마음이 깨어나는 그 찰나가 곧 깨달음이다. 길 위의 사색과 고요, 자연과의 교감은 마음 깊은 곳에 씨앗처럼 남아,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조용히 삶의 결을 바꾼다.
깊어 가는 가을, 길과 절,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이 고요하고 신비로운 불영사에서 우리는 자신과 마주하며, 잊고 지냈던 생의 본래 빛을 되찾을 수 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글=윤일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상] 월정교 위 수놓은 한복의 향연··· 신라 왕복부터 AI 한복까지](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510/news-m.v1.20251031.6f8bf5a4fea9457483eb7a759d3496d2_P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