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가을이 익어간다

  • 류시경 시인·대구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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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10 06:00  |  발행일 2025-11-09
류시경 시인·대구문인협회 자문위원

류시경 시인·대구문인협회 자문위원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감나무의 감도 익어간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감이 많았다. 긴 겨울 밤 마루 위의 나무 궤짝에 든 꽁꽁 언 홍시를 따뜻한 이불 밑에서 7남매가 나누어 먹은 추억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왓 담장 너머로 교복 치마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감나무 집 여학생을 훔쳐볼 때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쩌다가 그 여학생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날 때는 심장이 멎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나의 짝사랑은 감나무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한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흐르고 찬 기운이 얼굴을 스칠 때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早紅柿歌)가 흥얼거려진다.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이 나다 / 유자 아니라도 품음즉하다만은 / 품어 가 반길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한음 이덕형의 집에서 홍시 대접을 받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효행 시조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대감 이 주먹이 뉘 주먹이요?"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자기 집 감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도 생각난다. 이항복의 주먹은 나의 청년기를 자극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 일은 용기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멋모르고 불쑥 내민 나의 주먹은 거두어들이기는 이미 늦었다. 익지도 못한 채 떫기만 했던 나의 반항심이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라 한다. 합천에 사시는 지인이 대봉감 한 상자를 보내왔다. 대봉은 보기만으로도 배가 부르며 부드러운 식감으로 하루를 행복에 젖게 하는 신비로움이 있다. 선물 받은 대봉을 보니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고맙다는 인사는 울먹이며 말을 잇기 어려웠다.


감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홍시는 '마음이 익은 상태' 곶감은 호랑이가 제일 무서워한다는 '우는 아이 딸깍 그치게 하는 명약인 동시 인내의 결실'을 비유한다. 가을 뜨락에 앉아서 곶감 깎으시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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