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문화 독립의 선, 기억을 잇는 순간

  •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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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11 06:00  |  발행일 2025-11-10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 '삼청도도 – 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의 개막 초청 행사에 다녀왔다.


사립박물관을 운영하며 '기억을 지킨다'라는 무게를 몸으로 느껴온 나에게,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품 감상이 아닌 깊은 성찰의 자리였다.


초가을 햇살이 유리 벽을 타고 스며들던 오후, 묵향이 은은히 감도는 전시장의 문이 열렸다. 학예사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먹빛 선들이 공간을 채우고 매화와 난초, 대나무가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조선 선비들의 절개와 기개를 상징하는 그 형상들은 정제된 아름다움 속에 나라를 지키고자 한 한 시대의 정신을 품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오래 침묵했고, 나 역시 그 고요 속에서 박물관 휴르의 작은 전시장을 떠올렸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라지지 않으려는 마음은 같았다. 먹선 하나하나가 시대의 기억을 붙잡듯, 우리 같은 작은 사립박물관들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기억을 잇고 있다.


전시의 중심에는 '삼청첩'이 있었다. 이정이 그린 56면이 모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탄성은,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예술의 숨결이 다시 깨어났음을 알렸다.


전시장 벽면의 검은 유리는 은은한 빛을 머금어 반사되며, 마치 검은 비단 위 금빛으로 그린 이정의 그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듯했다. 붓끝에는 한 시대를 지탱한 신념과, 잊힘을 거부한 예술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일제강점기 문화재를 지키며 보여준 '문화 독립'의 정신이 그 선의 흐름 속에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전시장을 나서며 문득 생각했다. "기억은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 답은 화려한 건물이나 관람객 수에 있지 않았다. 사라질지 모르는 가치를 붙잡기 위해 묵묵히 문을 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 마음이야말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문화의 뿌리였다.


전시장 출구에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문장,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 말은 뇌리에 깊이 남아 긴 여운을 주었다. 간송이 지켜낸 정신과 맞닿아 있었고, 지금 이 시대 사립박물관이 걸어가야 할 길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간송미술관은, 우리 시대의 '기억의 그릇'이었다. 그 곁에서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기억을 지켜야 한다고. 비록 소박한 공간일지라도, 그 안의 기억이 모여 한 시대의 정신을 이어갈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조용히 박물관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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