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그 미술관은 어떻게 동양의 ‘서양미술관’이 됐나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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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13 16:40  |  발행일 2025-11-13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제가 설계한 건물이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제가 설계한 건물이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수많은 노숙자들을 지나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니 도쿄 우에노공원이다. 입구에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반겨준다. 그 뒤로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등 로댕의 다른 작품들이 서 있다. 또 그 뒤에는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현대적인 느낌에서 미술관으로 추측해본다.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이 건물은, 앞의 로댕의 작품들을 소장 중인 일본의 '국립서양미술관'이다.


국립서양미술관 입구에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확대작).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국립서양미술관 입구에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확대작).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동양 맨 끝에 국립기관으로 지정된 서양미술관이라니. 모네, 드가, 세잔, 르누아르, 고흐, 로댕…. 세계 거장들의 걸작은 물론 소묘, 판화,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약 6천여점의 서양미술 작품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선 특별전으로 볼 법한 작품들이 모여 있어 입구에서부터 질투가 났다. 비(非)유럽권에서 유럽 미술품을 대거 감상할 수 있어 평일에도 인산인해다.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현희기자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현희기자

서양미술 걸작들이 왜 이곳에 모여 있을까. 그 시작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 유럽을 다니며 미술품을 수집한 한 일본 금수저가 있다. 메이지시대 총리를 지낸 정치가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셋째 아들인 마쓰카타 고지로(1866~1950)다. 국립서양미술관은 마쓰카타 고지로가 수집한 컬렉션을 발판으로 1959년 문을 열었다.


마쓰카타 컬렉션의 창립자 마쓰카타 고지로(1866~1950). <일본 가와사키 중공업 제공>

'마쓰카타 컬렉션'의 창립자 마쓰카타 고지로(1866~1950). <일본 가와사키 중공업 제공>

◆"日에 서양미술관 만들겠다" 한 기업인의 집념


일본에서 태어난 마쓰카타는 도쿄에서 대학 예비 과정을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예일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길에 유럽을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공식 비서로 일하며 일찍부터 서양 문물에 눈뜨게 된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클로드 모네, '수련', 1916,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마쓰카타가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건 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1896년 그는 가와사키 조선소의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며 기업을 경영하게 되는데, 이때 전쟁 특수로 대호황을 맞아 큰 돈을 번다. 1916년 사업을 확장하러 런던으로 건너간 마쓰카타는 그 돈으로 10년간 미술품을 사모은다. 특히 인상파 작품에 매료돼 마네, 모네, 드가, 세잔, 고흐, 로댕 등 근대미술 거장들의 걸작을 대거 구매했다. 그의 전체 컬렉션은 약 1만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얼마나 방대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수집했는지 보여준다.


마쓰카타는 방치돼 있던 로댕의 지옥의 문을 구매해 청동으로 주조했다. 지옥의 문은 현재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마쓰카타는 방치돼 있던 로댕의 '지옥의 문'을 구매해 청동으로 주조했다. '지옥의 문'은 현재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그가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이유는 "일본에 미술관을 건립해 유럽 미술품을 전시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됐다"고 미술관은 전한다. 모네의 '수련' 그림을 얻기 위해 1921년 모네의 지베르니 작업실을 직접 방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거장의 그림을 실물로 접한 적 없는 고국의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간곡히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석고 상태로 방치돼 있던 로댕의 '지옥의 문'을 청동으로 주조하는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가 국립장식미술관 문으로 쓰기 위해 로댕에게 주문했다가 계약이 파기돼 마쓰카타가 기회를 잡았다.


폴 세잔, 퐁투와즈의 다리와 제방, 1881,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폴 세잔, '퐁투와즈의 다리와 제방', 1881,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그는 자신의 소장품 일부를 갖고 일본으로 돌아와 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운다. 도쿄 중심부에 부지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1927년 대공황 여파로 가와사키 조선소가 파산하며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위기에 처한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재산을 처분하면서, 마쓰카타의 소장품도 경매를 통해 흩어지게 된다. 런던 창고에 보관한 작품도 1939년 화재로 손실된다.


운 좋게 프랑스에 보관한 작품들이 돌아온다. 마쓰카타는 절친 베네디테가 관장으로 있던 로댕미술관에 소장품 400여점을 맡겨놓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며 프랑스 정부에 압류됐지만, 양국 간 관계 회복으로 1959년 대부분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소장품을 돌려주는 대신 "도쿄에 전용 미술관을 마련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건축 역시 프랑스 건축가에게 맡길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로 르코르뷔제가 설계한 국립서양미술관이 탄생하게 된 것.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이 1960년 개최한 개관 1주년 전시 포스터.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이 1960년 개최한 개관 1주년 전시 포스터.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이 사이 마쓰카타는 미술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50년 오사카에서 사망했지만, 그가 모은 작품은 국립서양미술관의 초석이 됐다. 1960년 개관 1주년을 맞아 열린 마쓰카타 컬렉션 걸작전 당시 마쓰카타의 소장품 195점이 전시됐는데, 약 두 달간 8만명이 방문했다.


국립서양미술관이 선보이는 상설전. 로댕의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다. 조현희기자

국립서양미술관이 선보이는 상설전. 로댕의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다. 조현희기자

◆모네에서 피카소까지…걸작 가득한 '세계문화유산'


국립서양미술관은 2007년 일본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프랑스 정부의 요구로 르코르뷔제가 건축한 건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가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가 생전에 완공한 유일한 미술관 건축물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빈센트 반 고흐, 장미, 1889,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 '장미', 1889, 캔버스에 유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소장>

소장품은 370여점에서 계속 늘어 현재 6천점에 이른다. 개관 초기 마쓰카타 컬렉션은 프랑스 근대미술 작품이 중심이었지만 그 후 독지가들의 기증과 미술관 자체 구매로 서양미술 전반으로 확장됐다. 마쓰카타가 수집했다가 각지로 흩어진 미술품도 조사해 사모으고 있다. 그가 소장한 근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부터 피카소, 미로, 더뷔페, 폴록 등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는 컬렉션을 자랑한다.


국립서양미술관의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 포스터.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국립서양미술관의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 포스터. <국립서양미술관 제공>

일본 국립서양미술관과 벨기에 그뢰닝게미술관이 한 점씩 소장 중인 성 야고보의 일생.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에서 100년 만에 함께 전시됐다. 조현희기자

일본 국립서양미술관과 벨기에 그뢰닝게미술관이 한 점씩 소장 중인 '성 야고보의 일생'.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에서 100년 만에 함께 전시됐다. 조현희기자

상설전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기획전도 자주 열린다. 지난달 31일 본관 2층에선 벨기에 브뤼주의 그뢰닝게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기획한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이 개최되고 있었다. 한 세트였던 두 작품이 100년 만에 함께 전시된 특별한 자리다. 두 기관은 각각 '성 야고보의 일생' 패널화를 한 점씩 소장하고 있다. 2017년 국립서양미술관의 조사로 두 작품이 한 세트였다가 1910년대 흩어졌음이 확인되면서 이번 전시가 기획됐다.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분석 결과도 공개해 학술적인 의미를 더했다.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에서 일본 국립서양미술관과 벨기에 그뢰닝게미술관이 한 점씩 성 야고보의 일생이 한 세트였다는 분석 결과가 공개됐다. 조현희기자

'두 점의 플랑드르 회화, 도쿄와 브뤼주에서 다시 만나다'展에서 일본 국립서양미술관과 벨기에 그뢰닝게미술관이 한 점씩 '성 야고보의 일생'이 한 세트였다는 분석 결과가 공개됐다. 조현희기자

지하 1층에선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한 인상파 명화를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인상파-실내를 둘러싼 이야기'가 열리고 있었다. '인상파의 전당'으로 불리는 오르세미술관의 대표 작품들이 10년 만에 일본을 찾은 이번 전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 거장들의 명작 68점에 일본 내 주요 소장품을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 중인 에드가 드가의 가족의 초상. 올해 국립서양미술관 전시로 일본에서 처음 공개됐다. 조현희기자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 중인 에드가 드가의 '가족의 초상'. 올해 국립서양미술관 전시로 일본에서 처음 공개됐다. 조현희기자

전시는 자연과 빛을 중심으로 이해돼온 인상주의를 '실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생활공간 속에서 화가들이 포착한 사적인 풍경과 인간의 표정, 실내 장식화를 통한 예술적 시도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에드가 드가의 '가족의 초상'이 일본에서 처음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복잡한 역사가 있었지만, 100년 전 한 개인의 열정이 국가유산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우리도 없는 건 아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빼앗긴 들에서도 문화보국(文化報國)을 몸소 실천했다. 그의 수집 철학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지켜냈고 간송미술관이란 전후무이한 문화자산을 낳았다. 마쓰카타의 꿈이 국립서양미술관으로 이어지고, 간송의 집념이 오늘날의 문화강국을 만든 것처럼 이런 사례가 계속 나오길 기대해본다. 물론 국가의 지원도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본 도쿄에서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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