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내 누구도 찾지않아 거미줄이 쳐진 대구의 한 반지하 주택 보일러실. 가스검침원은 막대기로 출입구에 쳐진 거미줄을 제거하고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윤정혜기자
가스검침원이 대구 한 주택의 어두컴컴한 반지하 보일러실에 들어가 가스누출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윤정혜 기자
◆ "계세요? 안전점검 왔습니다."
다세대 연립주택이 밀집한 대구의 한 주택가. 인적 드문 골목길엔 오전 내내 가스검침원의 외침만 반복해서 울렸다. "도시가스인데요, 계세요? 안전점검하러 왔습니다." 인기척이 들리는데 응답은 없다. "도시가스예요. 안전점검하러 왔어요." 검침원이 더 큰 소리로 외치자, '찰칵'하고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검침원은 익숙한 듯 마당 구석에서 긴 막대기를 찾아들더니 허공에 휘저으며 캄캄한 지하실로 들어갔다. 거미줄이 입구부터 여기저기 엉킨 탓이다. 열어둔 문으로 들어온 빛을 조명 삼아 가스배관과 보일러, 연통까지 검지기를 갖다 대며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집안으로 들어가 집주인과 마주할 차례다. 주방의 가스레인지와 밸브도 반드시 필요한 안전점검 대상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집에 들어가는 것은 누구나 긴장되는 일이다. TV 예능에서 인기연예인과 유명요리사가 직접 밥을 차려준다고 해도 문전박대가 일쑤다. 하물며 귀찮게만 느껴지는 일을 낯선 사람이 요구하면 집 주인은 달가울 리 없다. 고객의 집으로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업으로 하는 가스검침원(점검원)은 대부분 중년 여성이다. 반겨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차림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것은 때로 위험을 감수할 수도 있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난 12일 검침원과 안전점검을 함께한 시간은 가구방문 근로자를 보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검침원이 왜 감정노동자인지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안전점검은 낡은 단독주택과 다세대·연립주택이 밀집한 주택가에서 이뤄졌다. 지역과 동네를 공개하지 않는 건 검침원을 특정하지 않기 위함이다.
"도시가스인데요, 안전점검하러 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50대 후반의 검침원은 꽉 닫힌 문 앞에서 목이 쉴 정도로 외침을 반복했다. 초인종이 없거나 고장난 곳도 부지기수다. 여러 번 외쳐야 겨우 응답이 돌아온다. 바로 응답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일터에 나가 집이 빈 경우가 더 많다. 검침원에게 할당된 목표 점검률을 맞추기 위해서는 고객이 원하는 퇴근 후 야간이나 토요일 같은 휴일에도 작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잠을 깨워요" "우리 강아지에게 어떻게 했어요?"…쉽게 내뱉는 날카로운 말
간신히 들어간 집에서 몇 분이 지나 나온 검침원은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검침원 방문 소리에 잠에서 깼다는 고객은 '왜 지금와서 잠을 깨우냐'며 한껏 짜증을 부렸던 모양이다. "심장이 벌렁거릴 만큼 긴장되지만 그냥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웃고 있지만 눈물을 삼킨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도시가스사업법 제26조(안전관리규정)에 의해 도시가스 사용 가정이라면 안전점검을 1년에 1, 2회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귀찮아서 혹은 타인이 집에 들어오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방문한 검침원에게 짜증을 내거나 고함을 지르는 경우가 많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검침원은 다른 시·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50대 이상 여성이다. 사적 공간에 여성 혼자 들어가다 보니 성희롱이나 추행과 같은 성범죄에 노출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속옷만 입은 채 검침원을 맞는 경우는 너무 많다. 못 본 척 할 일을 하고 나오지만 가끔 보일러실에 따라오거나 가까이 붙어서는 경우도 있다. 시간 약속을 한 뒤 방문한 가정에서 남성이 알몸으로 나오는 사건도 몇해 전 대구에서 있었다. 여성 혼자 방문하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범행한 성추행 사건이다. 울산에서는 가스 점검중 감금·추행을 당한 검침원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건도 발생했다.
검침원을 지키는 도구로 호신용 스프레이가 주어진다. 하지만 스프레이를 꺼낼 여유도 없거니와 다음 점검 때 또 봐야 하는 고객이기 때문에 스프레이가 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도 못 한다는 게 검침원들의 하소연이다. 이들은 '2인 1조' 가구방문을 요구하지만 인건비 부담이 곧 가스요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탓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가스검침원이 옆으로 가야할 정도로 좁은 길을 돌아가면 지하에 보일러실이 있다. 겨울이면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의 길도 있고, 어떤 곳은 물건이 쌓여 곡예하듯 아슬하게 이동하기도 한다. 윤정혜 기자
쌓아둔 짐들 사이를 피해 구석에 위치한 가스보일러에서 검침원이 점검을 하고 있다. 윤정혜기자
오래된 주택의 보일러실은 대부분 지하나 구석에 있어 해충을 마주하는 경우도 흔하다. "살아있는 쥐는 도망이라도 가죠. 부패할대로 부패한 고양이 같은 동물 사체를 본 것도 여러 번이에요. 소름이 돋을 지경이죠."
벽과 건물 사이 좁게 난 길은 겨울에는 외투를 벗어야 간신히 지날 수 있고,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물건더미를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는 것도 일상이다. 애완동물에게 물리는 경우도 있지만, 개물림 사고보다 주인들의 태도가 검침원을 더 힘들게 한다. "우리 아이(강아지)에게 위협적으로 하지 않았어요?"라는 반문에 입을 다물게 된다.
감스검침원이 검지기로 가스보일러 주변의 일산화탄소 누출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윤정혜 기자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짜증스럽게 문을 열어주거나, 잠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쉽게 쏟아내는 날카로운 말들은 검침원에게 비수다.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몰라 공포심에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심리적 치료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힘들고 박봉인데 병원비를 쓰면서까지 일할 순 없죠. 그만두거나 아니면 모른척 참는 거고요." 감정노동을 강요받고 있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초 단기 '쪼개기 근로계약' 고용 불안도
지난 7월부터 도시가스 검침원 소속이 법인에서 개인사업자로 변경됐다. 300명이 넘던 검침원은 270여명으로 줄었다. 검침원 1인당 배정된 가구 수는 그만큼 늘었다. 검침원 한 명이 3천800가구에서 많게는 4천500가구를 담당한다. 매월 이 숫자만큼 계량기 검침을 해야 하고, 6개월에 한 번은 가정 방문으로 안전점검까지 마쳐야 한다. 근무연수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한 달 손에 쥐는 급여는 식대를 포함해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신규 고용되는 검침원은 두 세달로 쪼갠 단기 근로계약으로 고용 불안에도 노출돼 있다. 생계가 달린 검침원들은 계약 연장 여부를 눈치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업무가 같으면서도 3·6개월과 같은 1년 미만의 쪼개기 근로계약은 법상 문제는 되지 않지만 근로자들은 언제 그만둬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몬다.
고용노동부 대구지방고용노동청 관계자는 "계절적 요인으로 3개월, 6개월 단기 계약이 필요한 불가피한 요소가 아니라면 단기 계약은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을 가져오는 요소로 지양돼야 하는 근로형태"라고 지적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업무. 그래서 날카로운 말들과 짜증이 더 쉬웠던 건 아닌지 우리 사회가 성숙해가는 만큼 가구방문근로자를 대하는 태도와 인식에서도 성숙함이 필요해 보인다.
대구 다세대주택 건물 외벽에 설치된 도시가스 계량기를 검침하고 있는 검침원. 검침원 1인당 한달 검침해야 하는 세대수가 많게는 4천500곳에 이른다. 윤정혜기자
윤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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