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기쁨의 천 가지 얼굴'의 저자인 바이런 케이티는 '현실은 곧 신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신에 저항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이미 발생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또 어떤 사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저항한다.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돼', '저 사람은 바뀌어야 해',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등등. 모든 저항의 밑바닥에는 '지금 이대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반대로 항복은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내적 선언이다. 항복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다.
부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라고 했다. 우리가 피하려는 것, 억누르려는 것, 혹은 바꾸려는 것에 대한 집착이 곧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부처는 팔정도(八正道)에서 고통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은 집착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같은 맥락에서 달라이라마는 '고통은 일어나는 일을 원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는 일을 원할 때 생긴다.'고 말했다. 고통은 삶의 흐름에 저항하는 데서 비롯된다. 삶의 흐름에 저항할수록 우리는 더 큰 고통에 갇힌다. 열반(Nirvāṇa)이란 바로 이 저항의 소멸을 뜻한다. 욕망, 분노, 무지라는 세 가지 독(三毒)은 모두 저항의 다른 얼굴이다. 욕망은 현실이 이렇지 않기를 바라는 저항이고, 분노는 현실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저항이며, 무지는 현실이 본래 그러하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저항이다. 열반은 이 모든 저항이 사라진 상태, 즉 완전한 항복으로 얻게 되는 평화다.
불교심리학의 거장인 존 카밧진은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 치유'에서 고통을 피하려고 몸부림칠수록 불안과 스트레스가 증폭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받아들일 때 마음이 확장되며 그 순간 고통이 변형된다고 하였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기력한 패배가 아니라 마음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역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서 저항을 '현재 순간에 대한 비수용'이라 정의하였다. 우리가 현재를 거부하고 다른 상태를 갈망할 때 곧바로 고통이 생겨난다. 그는 '항복은 무기력한 굴복이 아니라, 존재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깊은 힘'이라고 말한다. 항복은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이자, 삶과 화해하는 행위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C. 헤이즈(Steven C. Hayes)가 제안한 '수용전념치료(ACT)'는 바로 저항의 역설을 적용한 인지행동치료 방법이다. 그는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고통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불안을 없애려는 노력이 불안을 강화하고, 슬픔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슬픔을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때 나와 세계, 선과 악, 고통과 평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삶은 우리를 통해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이 된다. 평화와 지복은 그 흐름 속에서, 저항이 멈춘 고요한 자리에서 피어난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다. 신앙이란 궁극적으로 '나'라는 에고를 내려놓고 신의 뜻에 항복하는 체험이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분리의 고통에서 벗어나 전체와 하나 되는 진정한 안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저항은 본질적으로 분리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라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자아는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고, 세계와 싸우려 한다. 그러나 세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다. 존재는 본래 상호의존적이며 그 안에서 '나'는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불교의 '무아(無我)'는 바로 그 통찰이다. '나'라는 환상을 내려놓을 때 저항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고요와 자유다. 항복은 현재 순간에 대한 수용이며 존재 그 자체와의 화해이다. 삶은 끊임없는 파도와 같다. 파도와 싸우려는 자는 고통을 겪지만, 파도에 몸을 맡기는 자는 흐름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저항은 시간을 만든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원할 때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도망친다. 항복은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의 저자 김기태는 모자라고, 찌질하고, 부족한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멈추면 바로 이곳이 천국이고 극락이라고 하였다. 당신은 지금 어느 시간, 어느 곳에 있는가? 어디에 있든지 지금 이 자리로 돌아와 완전하라. 이곳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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