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픽] 단종의 비극, 김천에서 충절로 피어나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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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19 22:01  |  발행일 2026-03-19
섬계서원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섬계서원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섬계서원 은행나무.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섬계서원 은행나무.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섬계서원 세충사에 모셔진 백촌 김문기 선생 초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섬계서원 세충사에 모셔진 백촌 김문기 선생 초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가장 정통성 있는 왕이었으나,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조선조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천400만명에 육박하는 등 기록적인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이처럼 600년 가까운 시공을 뛰어넘어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 비운의 임금 단종에게 몰입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정서 속에 살아있는 '의리'와 '절개'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는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걸었던 백촌(白村) 김문기 선생 직계 후손들의 세거지이며, 같은 마을 섬계서원(경북도 기념물 제160호)은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정통성 있는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신과 가문의 안위를 모두 던져버린 선생의 뜨거운 숨결이 서원 곳곳에 배어 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던 1456년(세조 1년) 6월, 백촌 선생은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서, 대궐에서 거사가 결행되면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고관들을 회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했고, 선생은 같은 달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절했다. 이때 선생의 장남은 사형당하고 손자들은 상주 관아의 노비로, 부인·며느리·딸들도 세도가의 노비로 전락하는 등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 후 270여년이 지난 1731년(영조 7년)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면서 명예를 회복했고, 근대에 들어선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78년 5월 사육신 묘역에 선생의 가묘(假墓)가 봉안됐다.


백촌 선생이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단종을 향한 '의리'와 '절개'엔 직계 후손들의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상주 관아의 관노였던 백촌 선생의 큰손자는 상주목사의 묵인 하에 15세에 본향인 충북 옥천으로 이주했고, 그의 후손 일부가 영동으로 옮겼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또다시 김천 조룡리로 이주해 정착했다"며 "이 과정에서 백촌 선생의 후손들은 온갖 신산을 겪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끝에 백촌 선생이 복권되자, 문중에서 건축비용을 조성해 1802년에 섬계서원을 건립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등 빠르게 가문의 정통성을 회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섬계서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300호)는 높이 28m, 둘레 11.6m의 고목으로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다. 송 국장은 "서원을 지을 당시 '고려 말에 심은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앞쪽엔 강당을, 왼편엔 사당을 배치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며 "이에 미뤄볼 때 수령은 7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에 이어 두 번째 고목"이라고 소개했다. 이 은행나무는 과거 섬계서원이 학생들에게 무료 교육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나무에서 수확하는 은행만 내다 팔아도 학비를 받지 않고도 서원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하(69) 김령김씨 김천종친회장(백촌 27대손)은 "백촌 할아버지께서는 단종 복위라는 당연하고도 정의로운 일을 하려 했으나, 가문 전체가 역사적 회오리에 휩싸여 오랜 세월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며 "뒤늦게나마 할아버지께서 사육신에 포함되고, 노량진 사육신공원 묘역에 봉안됨으로써 종원들의 자존심이 회복됐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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