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한양에서 천리 길 떨어진 경북 영덕 영해(寧海)는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자 세상의 끝이었다. 험준한 산맥이 앞을 가로막고 거친 동해가 뒤를 받치는 이 척박한 땅은 물리적 격리를 상징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해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머물며 고립을 사유로 절망을 문학과 학문으로 승화시킨 '지적 해방구'였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가 경북 북부 유교 문화권의 핵심 지역 중 한 곳으로 '예의를 아는 고을'이라는 뜻의 '예주(禮州)'라고 불렸다.
영덕지역 유배사의 흐름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로 고산 윤선도의 시심(詩心), 갈암 이현일의 학통(學統), 이한응의 기개(氣槪)가 서린 유배 역사를 다시 짚어본다.
◆고산 윤선도: 적벽(赤壁)의 파도 소리에서 가사문학의 발원지를 찾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선도는 평생 총 세 번의 유배를 겪었는데, 그중 두 번의 유배지가 영덕(영해)이다. 먼저 광해군 8년(1616년), 성균관 유생이었던 고산 윤선도는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 등 대북파의 부패와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왕의 미움을 사면서 영덕으로 유배됐다.
영덕 풍력발전단지 내 해맞이공원 인근에 고산 윤선도가 '새거처에서 한가위를 맞이하며 외로움을 달랬다(新居迎中秋)'는 내용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남두백 기자>
약 1년 정도 머무른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고불봉과 적벽봉, 임경대 등 영덕의 풍광을 시문으로 남기며 지역 문인들과 교류했다.
이때 영덕의 선비들(신이겸·신이상 형제 등)과 교류하며 중앙 문학의 정수를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병자호란 때에 인조 임금을 호종(扈從)하지 못한 죄로 인조 16년(1638) 귀양을 받아 그해 6월에 영덕에 도착해 이듬해 2월에 방면될 때까지 약 8개월간 영덕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고산은 영덕 영해의 자연을 노래한 20여 수의 시문을 남겼다. 그는 영덕의 고불봉에 올라 굽이치는 산맥을 바라보고 동해의 파도를 대면했다. 고립된 유배객에게 자연은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영덕팔경 중 하나인 고불봉은 영덕읍 우곡리와 강구면 하저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산 윤선도는 생전에 '고불봉'이라는 시를 남겼다. <남두백 기자>
비록 그의 대표작인 '어부사시사'는 훗날 보길도에서 완성됐으나 영해의 거친 바다에서 느꼈던 고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고산 문학의 단단한 뿌리가 됐다.
영덕군은 2006년 그가 타향에서 맞은 추석의 쓸쓸함을 노래한 '새 거처에서 한가위를 맞이하다(新居迎中秋)' 시비를 세워 시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시비는 푸른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영덕읍 창포 풍력발전 단지 언덕에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갈암 이현일: 유배지에서 영남 남인의 '사상적 종가'를 세우다
영해 인량리 출신의 갈암 이현일에게 유배는 더욱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외지인이 아닌 '고향으로 돌아온 유배객'이었다. 숙종 대에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는 성균관 좨주(祭酒)와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갑술환국(1694년)으로 정치적 상황이 뒤집히면서 그는 함경도 홍원과 종성 등지로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후 광양으로 이배된 뒤 1700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갈암의 유배 생활은 '중단 없는 탐구'였다. 그는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좁은 공간에서도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옹호하는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특히 율곡 이이의 학설에 맞서 영남 남인의 대표 학자로 영남학파의 사상적 자존심을 세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유배지 앞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전국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영남 남인의 종장인 갈암 이현일 가문의 위엄과 품격을 상징하는 갈암 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길러낸 300여 명의 제자들은 훗날 영남 남인의 거대한 학맥을 형성했고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 논쟁의 중심축이 되었다. 갈암에게 유배는 단순한 귀양지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후학에게 전수하는 '움직이는 대학'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영덕 창수면 인량리에는 1910년에 후손들이 세운 종택에서 12대손 이원흥씨와 부인 김호진씨가 살고 있다.
조선 후기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구조를 보여주는 종택의 본채는 갈암 이현일 선생의 학문적 깊이만큼이나 단아하고 정갈한 건축미가 특징이다. <남두백 기자>
종손인 이씨 부부는 15년 전 퇴직하면서 서울 생활을 접고 종택 관리를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 김씨는 "해마다 종친들과 모여 10여 차례의 제사를 모시는데 나도 종가집 태생이라 크게 힘들지 않다"라며 "대신 정자와 본채, 별채 등 6동의 한옥 관리를 매일 해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350~400년 역사를 가진 인량리 전통마을은 현재 8성 씨 12종가의 종택과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박장원 인량 2리 이장은 "전통마을이라는 자부심도 있지만 마을 주민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도 상당하다"라고 말했다.
◆이한응: 충무공의 피가 흐르는 무인, 직언의 가치를 지키다
무신 이한응의 유배는 영해의 인문학적 토양에 강직함이라는 색채를 더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증손인 그는 영조 28년(1752년), 왕 앞에서 두려움 없이 소신을 밝히는 직언(直言)을 하다가 영해로 유배됐다.
무관이었던 그의 유배 생활은 문인들과는 또 달랐다. 그는 적거지 근처의 해안 지형을 살피며 국방의 안위를 걱정했고 매일같이 몸과 마음을 닦으며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무인의 기개를 유지했다. 지역 선비들은 권력의 서슬 아래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강직한 성품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역 민초들에게 충무공 가문의 충절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무인의 도리'를 전파했다. 훗날 유배에서 풀려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라는 중책을 맡아 영덕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단순한 관리가 아닌 지역의 정신적 귀감이 돼 있었다. 그의 존재는 영해를 '문(文)과 무(武)가 조화된 절개의 땅'으로 완성시켰다.
영덕문화원 이완섭 국장은 "고려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략 50여 명의 인사가 영덕에 유배 온 기록을 찾을 수 있다"라며 "역사 속에 기록된 영덕은 지금처럼 지역 구분이 없지만, 당시 수도인 개성과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기에 귀양살이를 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세 명의 인물들에게 영덕(영해)의 유배 역사는 제한된 공간에서 오히려 자신을 뛰어넘는 성취를 이뤄낸 곳으로 기억된다. 윤선도는 문학으로, 이현일은 학문으로, 이한응은 기개로 영해의 바람 속에 불멸의 흔적을 역사에 새겼다.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는 이제 죄인의 흔적은 사라졌고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장소로 변모했다.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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