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공원에 위치한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 기념비'. 대구지방보훈청은 기념비를 4월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김현목 기자
7일 오전 대구 달성공원은 평일임에도 시민들 발걸음이 잦았다. 유치원생들이 줄을 맞춰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공원 입구에서 조금 들어온 뒤 왼쪽 언덕 위를 바라봤다. 독립운동가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1858~1932년)을 기리는 '구국 기념비'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향하는 시민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기념비는 언덕에 자리해 아래에서도 어느 정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내 표지판이나 설명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념비 앞에도 안내문이 없어 이곳이 누구를 기리는 공간인지 알 수 없었다. 기념비를 유심히 바라봐야 석주 선생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검정색 바탕의 기념비는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어서인지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실제 인근을 지나던 시민들 상당수는 기념비를 무심코 지나쳤다. 대구보훈청은 석주 선생 기념비를 '4월의 현충시설'로 선정했지만 현장에선 그 상징성이 크지 않아 보였다.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서 태어나 유학자로서 학문을 닦은 뒤 계몽운동에 나섰다.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무장투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규합에도 힘썼다. 정부는 석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독립 기여도에 비하면 격이 맞지 않는다는 여론이 적잖다.
석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달성공원 내 구국 기념비는 1963년 건립됐다. 달성공원 부지는 1915년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곳이다. 1960년대 대구시가 달성공원 종합계획을 세우면서 독립운동 서훈을 받으신 분들의 기념탑 등을 한곳으로 모으면서 석주 선생의 기념비도 이곳에 설치됐다. 당시엔 독립운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대구에서 경북까지 담당했다. 이에 따라 경북 출신 인사들의 기념비 등도 달성공원으로 모였다. 2003년 현충시설로 지정됐지만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구 달성공원에 위치한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 기념비' 측면 모습. 대구지방보훈청은 기념비를 4월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김현목 기자
공원에서 만난 곽상훈(71·중구 대신동)씨는 "여러 번 공원을 찾았지만 기념비 주인공은 잘 몰랐다"며 "설명이나 안내가 있었다면 한 번쯤 들러봤을 것 같다"고 했다.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전문가들은 선생의 삶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평가했다.
광복회 대구시지부 정인열 사무국장은 석주 선생에 대해 당대 손꼽힐 정도의 부유한 유림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내놓고 가족과 망명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는 것, 불확실한 미래에 전 재산을 거는 것, 가족을 이끄는 결단, 임시정부 국무령이라는 위험한 공직까지 맡은 선택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정 사무국장은 "당시 독립운동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런 보장 없이 행동에 나섰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정신"이라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이어 "전 세계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국가에 대한 헌신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는 분"이라고 부연했다.
김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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