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이 있는 성태영이 살았던 집. 주민에 의하면 백범은 현재 대문자리에 있던 사랑방에 묵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경북 김천 부항면 달이실(월곡리)엔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수감된 감옥에서 탈옥한, 젊은 백범 김구의 뜨거운 숨결이 짙게 배어 있다(영남일보 '감천 백오십리를 가다' 12편, '백범 김구가 월곡리에 머문 까닭은' 참조). 아울러 백범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달이실 부호 성태영(1867~1949), 달이실과 이웃한 전북 무풍면 이시발(1855~1934)과 유완무(1861~1909) 등 항일 비밀결사 애국지사들의 힘찬 숨결도 함께 느껴진다.
전북 무풍면에서 달이실로 연결되는 오솔길. 무풍 이시발의 집을 나선 백범은 이 길을 따라 성태영의 집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무주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1896년 3월, 백범(김창수)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리소에 수감됐다. 이에 유완무 등은 13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감옥에 불을 지르고 백범을 구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앞서 백범이 탈옥(1898년)함으로써 거사는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유완무는 우여곡절 끝에 삼남에 잠적하며 가명(김두호)을 쓰거나, 마곡사 승려(법명 원종)로 은거하다 환속한 백범과 1900년 상면한다.
이때부터 청년 김창수를 동지로 훈련시키려는 유완무 등의 프로젝트는 본격화된다. 처음엔 충남 연산(논산)의 동지(이천경)집으로 보내 한 달을 머물게 한 뒤, 전북 무풍의 동지(이시발) 집을 잠시 거쳐 김천 달이실 동지(성태영)에게 보내 한 달간 머물게 하면서 동지들로 하여금 인물 됨됨이를 관찰하게 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때 "아직 학식이 얕으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자"는 결론을 얻었다. 당시 이들은 백범에 대한 교육을 경성(서울)의 동지들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스물다섯 살 청년 김창수는 김천 달이실에 머물던 1900년 8월 어느 날, 유완무와 성태영이 작명한 거북구(龜)로 이름을 바꿔 김구가 됐다. 이때 연하(蓮下)라는 호도 얻었다. 백범 연구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백범 연구가)는 저서 '백범의 길'에서 "이름을 고치고 호를 얻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결정이다. 개명한 이유는 김창수란 이름이 치하포사건과 인천감옥 탈옥사건 범인으로 등재돼 있어 비밀활동을 하는 데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유완무와 조직원들은 청년 김창수를 오랫동안 시험해보고, 조직원으로 포섭하면서 지어준 이름이 거북이, 즉 구(龜)였다. 거북바위가 달이실을 지키 듯,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는 인물이 되길 기대하면서 개명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달이실은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변에 있는, 달을 바라보는 형상의 거북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달이실 냇가 '거북바위'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몸체는 땅에 묻히고 머리 부분만 남아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이처럼 차곡차곡 진행되던 '김구 지사(志士) 만들기 프로젝트'는 1901년 1월, 백범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중단된다. 1914년엔 "하등사회(백정범부)라도 애국심이 나 정도는 돼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다"며 이름을 아홉 구(九)인 김구로 개명하고 호도 백범으로 바꿨다.
달이실 부호이자, 백범의 동지인 성태영의 행적 대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다. 다만 그의 애국 활동도 여느 애국지사에 비해 뒤질 게 없음을 보여주는 일부 행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성태영은 탈옥수 김창수(백범)를 만날 당시 유안무와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후원하고 있었다. 심산사상연구회가 펴낸 '김창숙 문존'에 따르면 그는 "구한말 양심적인 지주로서 젊은 인재를 보살피며 애국적인 사업에 여러 가지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심산은 성태영, 유안무, 김노규와 함께 "나라가 망하려 한다. 우리가 광복을 도모하려 한다면, 어찌 만주지방으로 가서 근거가 될 터전을 개척하지 않겠는가?"라며 심양(선양), 북간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둘러 봤다. 이때 성태영은 '만석(萬石)이나 되는 큰 돈'을 개척 자금으로 내놓으며 일을 추진하게 했다. 그러나 일을 주도하던 유안무와 김노규가 급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영구 김천시 경제기획팀장은 "성태영은 1919년, 3·1운동 당시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배제된 것을 심산 김창숙과 함께 통탄하며, 심산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한,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기획하고 진행과정에서 경기·황해지역 서명운동을 담당하는 등 유림계 항일투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며 "이후엔 중국 지린성에 거주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과 서신을 통해 소통하는 가운데 한인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흥업계를 발기해 한인촌 건설에 나서기도 했다. 남만주에선 한족노동당 중앙의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백범이 머물 때에도 달이실의 '월곡숲'은 푸르렀다. 김천시는 이곳에 '백범 김구선생 은거기념비'를 세워두고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이러한 성태영의 족적은 달이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았고, 백범이 잠시 머물던 집의 터는 남아 있지만, 슬래브로 신축한 콘크리트 주택 어디에서도 나라를 되찾을 걱정으로 숱한 밤을 지새웠을 그를 떠올릴 만한 흔적은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만이 문패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달이실 마을 원로 김원진(83)씨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분명하진 않지만, 아주 큰 돌담집을 어른들은 '부잣집'이라 했다"며 "그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고, 아마 한약재 유통업을 했을 것"이라며 "성태영의 후손인지는 모르지만 오래전에 마을에서 '성약방'이란 한약방을 열고, 침을 놓고 약도 지어준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마을 주변엔 그들의 선산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달이실 사람 대부분이 백범이 은거한 사실은 알면서도 정작 성태영 일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이처럼 뚜렷한 항일 공적이 있음에도 성태영 지사는 철저히 잊혀졌다.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체계적 공훈 발굴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지역 일각에선 백범의 달이실 은거와 관련해 충남 공주(마곡사)의 백범당, 백범 명상길이나, 전남 보성의 백범은거기념관과 같은 기념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박현주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상] 국민의힘 대구·경북 공동 비전선포식…지방선거 승리 다짐하며 필승 결의](https://www.yeongnam.com/mnt/file_m/202605/news-m.v1.20260526.22f2b9026f9a48548a9db0107d95207c_P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