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 HRD교육원 부원장
정치는 양쪽에서 서로를 죽일 듯이 으르렁거린다. 자신과 뜻이 다른 일에는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는 힘의 논리를 통한 극단적 대치만 되풀이한다. 일반 소시민들도 대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조차 법정을 향해 달려간다. '너 죽고 나 살자'식의 극단적 싸움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왜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가? 오랜 역사를 되짚어보면 인간은 몇가지 결정적인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이 있을 때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거나 같이 고생해놓고 자기 세력이 커지면 동료마저 쫓아내는 일들, 상대가 건넨 순수한 양보와 호의를 약점으로 삼아 공격하는 것들이 우리의 근현대에 수없이 일어났다.
되풀이되었던 오류를 오늘날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대화 테이블에 앉아 먼저 손을 내밀고 양보했더니, 돌아오는 것이 고마움이 아니라 "거봐라, 너희가 틀렸지?"라는 식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결국 사람들은 '먼저 양보하면 손해'라는 냉소를 학습하게 된다.
대화와 타협을 막아서는 원인들은 무엇일까?
첫째,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구조다. 단 한 표 차이라도 이기면 모든 권력을 쥐게 되니, 상대를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다독이기보다 악마화시키고 내 편을 하나로 묶는 손쉬운 정치기술을 사용하게 됐다. 타협을 시도하는 정치인은 소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신자프레임에 갇혀버린다. 승자독식의 가치만 가르치는 학교와 이를 우선시하는 사회가 발판을 깔아 놓았다. 이런 구조가 이어지면서 불통의 사회는 공고해지고 있다.
둘째, 극단과 자극을 선호하고 보상하는 미디어환경이다. 상대를 거칠게 물어뜯는 영상이 더 많은 수익과 영향력을 얻게 만드는 SNS세상이다. 중도와 타협을 말하는 목소리는 알고리즘의 외면을 받는다. 레거시미디어조차 이에 편승하며 확증편향의 시장에 갇혔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중용의 길은 편향된 SNS가 집어삼킨 지금의 미디어환경에서는 설 자리를 잃었다. '증오와 조롱'이 조회수가 되고 돈이 되는 알고리즘 환경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대화와 타협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셋째, 사과와 용서가 증발한 문화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공격의 표적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양보'와 '배려'는 갈등을 푸는 지혜가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을 제공하는 행위가 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에 대해서는 분명한 처분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의 작은 실수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가 고착화된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수를 감추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 파열음을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은 '같이'라는 가치를 영영 잃어버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끊어진 대화의 다리를 놓고 잊어버린 대화의 테이블을 찾아야 한다.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내는 정당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손질하고 유권자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중대한 법안을 다룰 때는 의무적인 숙의 유예 기간을 두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일상에서도 사법적 분쟁으로 번지기 전에 갈등을 조정해 주는 공적 중재 기구를 두텁게 넓혀가야 한다.
타협은 내 신념을 꺾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가장 성숙한 지혜다. 절제된 태도와 타인의 양보를 존중할 줄 아는 시민의식이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는 품격 있는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
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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