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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선종 6대 조사인 혜능의 두개골(頂相)이 봉안돼 있다는 쌍계사 금당. 금당 안에는 육조정상탑이 있고, 그 아래에 육조의 정상이 봉안된 돌함이 묻혀 있다고 전한다. |
쌍계사(雙溪寺·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앞 십리벚꽃길은 우리나라 최고의 벚꽃길이다. 계곡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늘어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들이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지금은 벚꽃 철이 지나 꿈같은 벚꽃 풍경을 볼 수는 없지만, 근래 급격히 늘어난 계곡 주위의 녹색 차밭이 색다른 운치를 선사한다.
벚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쌍계사 앞 음식점 상가 골목이 나온다. 옛길인 이 상가 골목을 잠시 걸어 오르면 두 개의 큰 바위가 문처럼 나타난다. 그 양쪽 바위에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수많은 전설을 남긴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글씨다. 당당함과 힘이 느껴진다. 최치원은 왕명에 따라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선사의 삶과 업적을 담은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을 짓고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쌍계사에는 다른 사찰에 없는 특별한 전각이 하나 있다. 죽은 사람의 두개골(頂相)을 모신 곳인 금당(金堂) 건물이다. 이 금당에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추사 김정희 글씨의 편액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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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에 걸려 있던 추사 김정희 글씨 편액 ‘육조정상탑’(위)과 ‘세계일화조종육엽’ 원본.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선종(禪宗) 6대 조사 혜능의 머리를 가져와 봉안했다는 금당
쌍계사 금당은 신라 스님의 지극한 구도열이 서린 이야기가 전하는 성역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중국의 혜능(慧能) 선사(638~713)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 스님이 입적해 버리고 말자, 직접 중국에 들어가 입적한 혜능의 두개골을 가져와 돌함 속에 봉안한 뒤 그 곁에서 수행했다는 내용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 스님(661~739 추정)은 당시 당나라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있던 중국 선종 6대(六代) 조사(祖師)인 혜능 선사를 흠모해 그를 찾아가 도를 묻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혜능이 713년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작은 나라에서 혜능 선사보다 늦게 태어나 당대의 진불(眞佛)을 참배하지 못하고 말았다”며 애통해했다. 그 후 한 스님으로부터 혜능의 설법 내용을 담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을 접하게 되면서 큰 감동과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내용 중 ‘내가 입적한 뒤 5~6년 후 나의 머리를 취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고는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나의 힘으로 도모해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이 되게 하리라’고 마음먹는다.
그는 김유신의 부인이던, 영묘사(靈妙寺)의 법정(法淨) 비구니에게 뜻을 밝히고 2만금을 희사받은 뒤, 722년 5월 상선을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혜능의 머리를 취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다 공부하러 와 있던 신라의 대비(大悲) 스님을 만나게 돼 서로 뜻을 합하게 된다. 대비 스님과는 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두 스님은 중국인 장정만(張淨滿)의 도움을 받아 소주(紹州) 보림사(寶林寺)의 육조탑에 있는 혜능의 정상을 가져올 수 있게 된다.
11월 항주에서 배를 타고 귀국한 후 영묘사에 정상을 모시고 예배를 올리는데, 삼법 스님의 꿈에 한 노사(老師)가 나타나 육조 정상을 지리산 아래 ‘눈 속에 칡꽃이 핀 곳(雪裏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주었다. 이에 대비 스님과 함께 호랑이의 안내를 따라 눈 덮인 지리산 중 칡꽃이 피어난 자리를 찾아 정상을 돌로 만든 함에 넣어 땅 속에 안치한 뒤, 그 아래에 수행공간을 지어 날마다 선정을 닦다 입적했다. 그 후 수행공간인 화개난야(花開蘭若)는 화재로 소실되고, 그 터에 진감국사가 육조 정상을 모시는 육조영당(六祖影堂)을 건립했다.
고려 때 각훈(覺訓) 대사가 남긴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의 내용이다. 각훈은 이 글 말미에 ‘부처님의 두골을 오대산에 봉안하고 육조의 두골은 지리산에 봉안했으니, 이 나라 남북 천리에 부처님과 육조의 정상이 있도다. 한 분은 10만 리 인도 땅에서 왔고, 한 분은 2만 리 중국에서 와서 영원히 이 나라를 지켜주시니,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참으로 불법의 본원(本元)이요 보배로운 곳임을 명확하게 알겠도다. 이는 삼법화상의 옛글에 의거해 간략하게 엮은 것이다. 육조의 정상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노라’고 적었다.
현재 금당 내 석감(石龕) 위에는 7층 석탑이 있는데, 이는 1800년대에 주변에 있던 목압사(木鴨寺)의 석탑을 용담(龍潭)선사가 옮겨와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이 탑은 ‘육조정상탑’으로 불렸고, 전각은 ‘육조정상탑전’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건물은 1797년에 중수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 글씨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엽’
육조정상탑전인 금당에는 앞면 중앙에 ‘금당(金堂)’이라는 편액이 있고, 그 좌우에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편액이 걸려 있다. 둘 다 조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추사풍이 물씬 나는 글씨 편액이다. 현재 걸린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추사가 이 편액 글씨를 쌍계사에 써 준 내력은 따로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당시 추사와 친했던 만허(晩虛) 스님이 금당에 머물고 있었던 데다 추사가 불교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만허는 차도 잘 만들었고, 그 차를 추사에게 보내 맛보게 하곤 했다. ‘완당선생전집’의 ‘희증만허병서(戱贈晩虛幷書)’에 소개돼 있는 ‘만허는 쌍계사 육조탑 아래에 주석하는데 제다(製茶)에 공교(工巧)해서 차를 가지고 와 먹게 해 준다. 비록 용정(龍井)의 두강(頭綱)이라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다. 향적세계(香積世界)의 부엌에도 이런 무상묘미(無上妙味)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종일구(茶鐘一具)를 기증해 육조탑 앞에 차를 공양하게 했다’는 글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게 한다.
불교 선종은 달마대사를 시조로 꼽는다. 남인도 향지국 왕자로 태어난 달마는 일찍 출가해 수도하다 중국으로 건너왔다. 소림사에서 면벽 9년 수행한 그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근본교의를 확립했다. 이후 2조 혜가, 3종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쳐 6조 혜능으로 이어지면서 선은 심화되고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세계일화조종육엽’은 이 같은 선종의 역사를 담은 표현으로, 부처님이 깨달은 자리인 불법의 세계(한 송이 꽃)가 초조 달마에서 6조 혜능까지 이어졌다는 의미다.
금당 좌우 건물에는 ‘서방장(西方丈)’과 ‘동방장(東方丈)’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선승들이 좌선 수행하는 공간인 선방이다. 각각 3칸짜리 13평 규모의 작은 건물로 10명 정도씩 앉을 수 있는 선방이지만, 수많은 고승이 거쳐 간 명당이다. 특히 서방장은 한 철만 제대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질 만큼 뛰어난 수행처로 통한다.
‘서방장’ ‘동방장’ 편액은 청남(菁南) 오제봉(1908~1991)의 글씨다. 당시 대표적 서예가였던 청남은 김천 출신으로 진주와 부산에서 주로 활동했다. 쌍계사의 ‘청학루(靑鶴樓)’ ‘범종루(梵鐘樓)’ 등 편액도 그의 글씨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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