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감천마을 골목끝 어린왕자가 산다

  • 이춘호 김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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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0   |  발행일 2016-05-20 제33면   |  수정 20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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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자랑하는 그리스의 섬, ‘산토리니’ 마을을 연상시키는 감천문화마을 전경.

해운대·광안리·송정.

부산의 3대 해수욕장이다. 어리바리한 관광객은 달맞이 언덕의 알록달록한 레스토랑이나 소문난 횟집에서 시원하게 카드 결제를 한 뒤 ‘부산구경 끝!’이라 할 것이다. 이건 부산의 맛을 피해간 것이다.

다시 칼을 갈아 여행가의 포스로 부산을 잠행한다면? 국내 해수욕장 1호인 송도해수욕장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관광은 볼 것만 본다. 그러나 여행은 사각지대의 진경을 인양할 줄 안다.

송도의 짝꿍은 영도. 송도와 영도 앞바다가 다른 바다보다 더 사유적이고 고혹한 이유는 뭘까. 마치 ‘이철수의 판화’ 같은, 해안 절벽 기슭에 온갖 색깔의 레고블록처럼 다닥다닥 올망졸망 스크럼을 짜고 있는 달동네 때문이다. 송도에는 ‘감천문화마을’, 영도에는 ‘흰여울문화마을’이 있다. 이 달동네가 부산의 ‘신미(新味)’를 피워내는 굴뚝 구실을 한다.

두 마을의 첫인상은?

그리스에서 가장 낙조가 좋은 오직 흰색과 블루만이 허용되는 ‘산토리니섬’, 잉카 유적이 남아 있는 남미 페루 해발 2천400m에 둥지를 튼 ‘마추픽추’ 같다. 트렌디한 해운대. 그보다는 외딴 골목에서 주운 파스텔톤의 손수건 같은 송도·영도 앞바다는 분명 행간이 한두 뼘 더 깊다. 기쁜 맘은 조금 눅눅하게, 우울한 맘은 쿨하게 만져준다. 두 마을은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비싼 음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멋’보다 ‘맛’있는 곳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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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탄다. 토성역 6번 출구에서 내린다. 마을버스를 갈아타면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와~ 관광객의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보다 기운이 몇 배 더 깊다.

마을 안내소와 전망대가 있는 ‘하늘마루(박태홍 작) 옥상’에 올라간다. 이런 작품이 있나 싶다. 라면 상자만 한 낡은 집, 골목, 담. 더 낡을 기력조차 상실한 이들 집을 위한 원색의 페인팅. 확실히 이 마을의 ‘화룡점정’이다. 우중충하고 찌든 달동네가 아니라 가장 세련되고 개벽한 동네다.

마을에 정착한 피란민 중 대부분이 ‘태극도’ 신자였다. 마을 앞쪽에는 옥녀봉이, 뒤쪽에는 천마산이 보인다. 천마와 옥녀의 음양이 합쳐진 지역이라고 해서 풍수학적으로도 길지란다.

태극도 신자들은 사통오달 정신을 갖고 있다. 골목길을 막지 않는다. 뒷집을 막히게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가장 계단이 많은 곳이 탄생한다. 현재 189계단과 148계단이 있다. 부산 초량동에도 168계단이 있지만 명함을 못 내민다.

예전 이 마을은 숨 죽은 ‘콩나물비빔밥’ 같았다. 이젠 아싹하다. 방금 텃밭에서 뜯어온 허브에 토마토 몇 토막과 버팔로 치즈를 섞어놓은 샐러드나 밀폐용기에 담긴 야채김밥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정경이다. 사방이 다 열려 있다. 용두산, 원도심, 부산항, 감천항 등이 한움큼에 쥐어진다. 마을기업 1호점 ‘감내카페’와 역시 마을기업인 ‘감천맛집’을 지나온다.

그리고 최고의 포토존에 도착했다. 나인주 작가의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란 작품이다. 차량이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게 길 끄트머리에 세워놓은 보호벽 위에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조각상을 ‘객수감’ 있게 앉혀 놓았다. 사진을 찍으려면 평일인데도 1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이 동네에선 삼진어묵 얘기를 하면 핀잔을 듣는다. ‘고래사어묵’이 있기 때문이다. 감내맛집 1층에 어묵 전문 마을기업 ‘고래사어묵’이 들어선 것이다. 고래사어묵은 1963년부터 부산에서 어묵을 만들고 있는 <주>늘푸른바다의 상표. 밀가루 대신 삶은 감자를 으깬 뒤 생선살과 채소를 섞어 만든다. 일반 어묵보다 식감이 더 쫀득하다.

노을이 졌다. 감천마을 골목 가로등이 ‘대체노을’로 투입된다. 청동빛 하늘이 고등어처럼 누워 있었다. 고등어초회와 곰피시락국으로 소문이 난 영도의 명물 식당 ‘달뜨네’로 향했다.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그래픽=김유종기자 dbwhd@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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