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5. 황외금 공화비닐화공지사 대표

  • 백경열
  • |
  • 입력 2016-09-01   |  발행일 2016-09-01 제6면   |  수정 2022-05-18 17:40
6·25전쟁때 渡日 가족과 생이별…비닐가공 업체로 정착 성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5. 황외금 공화비닐화공지사 대표
아들, 손자와 함께 방 안에서 포즈를 취한 황외금씨. 이들은 모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오른쪽은 황외금씨가 아들과 함께 운영 중인 ‘공화비닐화공지사’ 전경.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5. 황외금 공화비닐화공지사 대표

일본 자주 오가던 부친 권유로
1951년 18세에 밀항선 몸 실어
가공기술 배워 가족회사 시작
韓 대중가요로 망향의 한 달래


재일(在日) 조선인 중 많은 여성은 전쟁과 결혼으로 일본에 건너왔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거나, 남편의 손에 이끌려 불확실성이 가득한 섬나라에서의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강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거나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을 돕고 자식들을 보듬으며 성공적인 정착사를 써내려 갔다.

◆ 가족과 생이별…불확실성의 시대에서도 희망을 품고

황외금 공화비닐화공지사 대표(82)는 1933년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8세 때(1951년)부터 일본에서 생활하게 된 1세대 재일 조선인이다. 빗발치는 포탄을 피해 경주로 거처를 옮긴 후,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 사연을 갖고 있다. 평소 일본을 자주 오갔던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황 대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일본에 가라고 하셔서 참 슬펐다. 부모형제를 모두 (한국에) 놔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며 “아버지께서는 ‘한국은 전쟁 중이지만 일본은 안정이 돼 있으니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사흘 내내 설득하신 끝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사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친척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황 대표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모의 존재가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일본에 건너온 후 1년 정도 고모와 함께 살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나날을 살아가던 황 대표는 이후 두 살 위인 남편(고 남순채)을 만났다. 탄광에서 일을 했던 남편은 결혼 당시(1953년)에는 폐철을 주워서 내다 팔던 ‘스크라뿌(스크랩·scrap)’ 일을 했다. 이는 1세대 재일 조선인들이 많이 종사하던 밥벌이었다. 이후 남편은 우연히 ‘비닐가공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도쿄에서 관련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부부는 첫 아들을 낳기 전(1956년)에 평생의 먹거리를 구했고, 이후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 성공한 셈이다.

황 대표는 “당시 직원 수가 30명 가까이 됐는데, 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건 내 몫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며 “토목을 전공한 장남은 전공을 살려 토목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가업을 이어받은 상태”라고 했다.

◆ 비닐가공업, 가족이 함께 일궈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위치한 ‘공화비닐화공지사(共和ビニ-ル化工紙社)’는 황 대표가 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공장이다. ‘밥하는 게 일’이었을 정도로 수십 명에 달했던 직원 수는 지금은 7~8명 수준. 기술 발전에 따라 공정 대부분이 자동화된 덕분이다.

1982년 자본금 800만엔(약 8천800만원)을 들여 꾸린 이 공장은 다른 업체로부터 도서나 달력 등의 표지를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주로 받고 있다. 비닐과 다른 소재 사이에 접착제를 바르고 열을 가해 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다.

또한 공화비닐화공지사에서는 과자나 완구, 화장품 케이스를 만들거나 비닐로 된 라벨, 카드 등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제품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수요가 끊이지 않는 기술 중의 하나라 수익성이 좋다.

황 대표와 3년 전쯤 운명을 달리한 남편이 일군 사업이 처음부터 궤도에 올랐던 건 아니다. 사업의 시작은 남편에게서 비롯됐지만, 이 일을 위기에 빠뜨린 것도 남편이었다.

황 대표는 “공장 운영 초기 수익이 꽤 좋았다. 하지만 남편의 씀씀이가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남편은 소위 ‘기마에(きまえ)’가 있었다. 사람의 기질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주로 활달하고 ‘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죽은 남편이) 친구들과 당구를 자주 쳤는데, 어떤 날은 당구비와 온천비, 호텔비까지 다 낸 적도 있다”며 “그야말로 기분파였다. 특히 어려운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잘 퍼주는 사람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황 대표는 이러한 성향을 가진 ‘남편이자 사업 파트너’ 때문에 세 번 정도 위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사업장(가와사키시)으로 오게 된 이유는 마지막으로 찾아온 위기 때문이었다.

황 대표는 “당시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거래정지’ 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차액금 자료를 모아서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고 자료를 모아 보니 무려 1억6천만엔 정도의 부채가 있는 걸로 드러났다”며 “고심 끝에 집을 팔아서 1억엔의 빚을 갚고는 나머지 6천만엔이라는 짐을 떠안고 가와사키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남편이 기계만 달라고 은행에 사정을 했다. 일을 할 수 있도록 기계를 달라고, 운영을 해서 빚을 갚겠다고 얘기했다”며 “그렇게 본격적으로 공장을 가동했다”고 회상했다.

◆ 한 서린 ‘사랑은 아무나 하나’

황 대표는 공장이 위치한 건물에서 한 층을 따로 내어 살고 있다. 이곳으로 취재진을 이끈 황 대표는 식탁에 앉아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언뜻 눈에 들어온 A4용지 위에는 한국어로 쓰인 노래 가사가 빼곡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황 대표는 “직접 (한국어로) 가사를 써 가면서 노래를 배우고 있다”고 말하고는 이내 얼굴을 붉혔다.

올해 11월로 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꼭 3년이 된다. 낯설기만 했던 타지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남편은 이제 일본 땅에 없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는 황 대표. 그는 “이제는 한국에서 못 산다. 생활터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한평생을 살았고, 어느덧 고향이 낯설어져 버린 재일 조선인 1세대의 지금 모습에 펜을 쥔 손이 무겁기만 했다.

글=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사진=<사>인문사회연구소
공동기획 : 경상북도·인문사회연구소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키워드로 읽는 在日조선인의 삶-‘헌신’
“우리는 한민족” 1948년부터 모국에 성금·물품 적극 기부

재일조선인을 주축으로 한 재일동포 사회는 모국에 적극적인 기부 활동을 벌여왔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한민족’임을 가슴속에 되새기곤 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절실했다.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가 2008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들의 기부 활동은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대표팀을 위해 유니폼과 스포츠용품, 기념품 등을 후원한 게 처음이다. 이후 재일동포의 기부 활동은 6·25전쟁 때 집중됐다. 생필품은 물론 학교 건립 등을 위한 귀중한 자금이 재일동포의 주머니에서 아낌없이 나왔다. 당시 기부금은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해 환산하면 약 8억5천만원에 달할 정도다.

고향이 발전하길 바라는 재일동포의 기부 활동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전봇대나 가로등을 세우라며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60년대에는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통해 일제 라디오 1천300여대가 우리나라에 오기도 했다.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방위 성금’도 이때부터 전해지기 시작했다. 70년대에도 모국을 위한 기부는 이어졌고 우리나라는 재해의연활동에 쓰일 구호 물자를 사는 데에도 기부금을 요긴하게 썼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금의 성격도 조금씩 변했다. ‘고향 발전’을 위한 성금은 여전했지만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 ‘평화의 댐 건설 기금’ ‘5·18 광주 시민의연금’ ‘무연고 유골 안장 사업’ 등 국가적 기념 사업에도 많은 후원이 이뤄졌다. 90년대 이후에는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성금도 처음으로 전해졌다. 93년에는 대전 엑스포를 잘 치르라는 의미에서 후원금이 전달됐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도 성금이 답지했다. 모국의 발전사에 있어 재일동포는 언제나 함께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