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허구와 진실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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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04   |  발행일 2019-01-04 제39면   |  수정 2019-03-20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요지경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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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라벨 붙인 中 모조품 밀수 급증
국가기밀 가짜문건·가짜뉴스의 범람
거짓유공자·무자격교사 불편한 현실

피카소·고흐·이중섭·박수근 유명작가
동서고금 막론 가짜 미술품 논란 으뜸
가짜라도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기현상
해외 유명관광지 한국인 관광객은 봉


무술년이 저물고 기해년이 밝았으나 새해 벽두부터 ‘황금돼지 해’라는 수사와는 달리 빚에 몰린 중소기업인, 소상공인, 서민들이 회생(回生)법원을 찾아 채무조정을 받거나 파산절차를 밟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만 들린다. 해마다 이맘때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낭만적인 사자성어를 한번 쯤 떠올리며 가는 해를 아쉬워하고 오는 해에 희망을 걸어왔으나 지난 한 해를 힘겹게 살아온 서민들 가슴에는 싸늘한 냉기만 스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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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화백의 ‘숨겨진 나무의 기억들’. 6년 전부터 유족이 의혹을 제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뒤늦게 위작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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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해바라기’. 런던내셔널갤러리에 소장하고 있는 ‘해바라기’와 크리스티경매에서 일본 야스다보험회사가 4천만 달러에 낙찰받은 ‘해바라기’다. 화병에 서명이 있는 것이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원작이고 서명이 없는 작품이 일본에서 경매로 낙찰받은 작품. 처음에는 원작의 복제품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위작으로 판명나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 마치 별천지처럼 알려진 서울의 유명 백화점과 면세점에선 부유층이 몰려와 연말연시 선물용으로 루이뷔통, 에르메스, 구찌, 펜디, 샤넬 등 값비싼 5대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선 명품 라벨을 붙인 밀수품이 무더기로 적발되는 황당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중국산 짝퉁(모조품)이라고 했다. 가짜 명품이 판을 치고 일각에선 진짜와 가짜를 감별하는 소동까지 빚어지기 일쑤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누가 뭐래도 불편한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난세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지방선거 전 집권여당의 공천을 바라고 있던 한 광역시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부인을 사칭한 보이스 피싱에 당해 4억5천만 원이나 뜯기고 사기꾼의 자녀 취업까지 주선했다는 뉴스엔 어안이 벙벙하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범인은 간 크게 현 대통령을 사칭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 제2의 범행을 물색하다가 결국 들통이 났다. 게다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사칭해 각종 이권을 미끼로 거액을 사취한 보이스 피싱도 발생해 시중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청와대 대통령 안보보좌관과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사칭한 e메일과 국가기밀이 나돌고 가짜 문건까지 유포되고 있다. 최근 한 언론에선 북한 비핵화 협상과 관련한 국가안보실 문건을 입수했다며 한국이 종전선언을 서두르는 데 따른 미국의 의혹이 한·미 동맹에 심각한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정치권과 언론이 진짜의 탈을 쓴 가짜 권력에 놀아나는 형국이다. 청와대뿐 아니라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장을 사칭한 가짜 메일도 유포되어 외교부를 발칵 뒤집어 놨다. 때문에 청와대 대변인이 이례적으로 “대통령과 측근을 사칭하거나 한·미 동맹을 깨뜨리고 이간질하려는 반(反)국가적 행태에 속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정부가 그동안 서훈(敍勳)해온 국가유공자 중에서도 가짜가 드러났다고 한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10년간의 보수정권에서 서훈한 국가유공자 중 허위공적자 39명을 적발, 서훈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글쎄, 독립유공자뿐만 아니라 유공자 중에서도 가짜가 많다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나돌고 있다. 정부는 올해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전수조사에 들어가 가짜 유공자를 색출하고 부정수급한 국가유공자 보상금을 전액 환수키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가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가짜 국가유공자를 양산해왔다는 얘기가 아닌가. 왜 하필이면 이데올로기 갈등이 극심한 현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가짜가 진짜를 말아먹는 행태는 국정 혼란기에 언제나 기승을 부려왔다. 가짜의 원조는 뭐니뭐니 해도 가짜 이강석 사건! 자유당 말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된 이강석이 대구에 나타나 당시 경북지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용채까지 챙겼다가 가짜로 들통이 나 경북지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이 큰 망신을 당했다는 얘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엔 경북도교위(현 경북도교육청) 임시직원이 장학사 행세를 하며 무자격 가짜 교사 340여 명을 양산했다. 이른바 경북도교위 중등교사자격증 부정발급사건. 그때 가짜 교사들로부터 수업받은 학생들이 지금은 50대 후반, 60대 초반에 들어 가끔씩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쓴웃음을 짓는다고 한다. 특히 가짜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짜 미술품이 단연 으뜸을 차지한다. 해외 경매시장에 나도는 가짜 미술품 중에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파블로 피카소나 빈센트 반 고흐의 위작이 가장 많고 국내에선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의 그림이 위작 논란에 자주 휩쓸리는 편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 유족의 위작 의혹을 받고도 이성자 화백(1918∼2009)의 가짜 그림 ‘숨겨진 나무의 기억들’을 국민세금 3천700여 만원에 사들여 15년간 보유해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빈곤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과정에서 쌓인 콤플렉스 탓인가. 한국엔 유달리 가짜가 많고 가짜 선호도도 높다고 한다. 그래선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의 유명관광지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봉으로 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분간도 못하고 가격이 비싸면 비쌀수록 진짜로 착각하고 무조건 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시중 노래방에선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1980년대 유행했던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대중가요가 되살아나고 있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새해엔 허구가 춤추는 요지경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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