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1] 산사 매화....화엄사 각황전 앞, 맑으면서도 진붉은 ‘득도의 꽃’ 홀로…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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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1 08:13  |  수정 2021-07-06 10:36  |  발행일 2019-03-21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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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산속 매화는 치열한 수행자에게 득도의 기연을 선사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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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매(古梅)는 대부분 산사에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왼쪽 건물)의 홍매.

지난해 6월 한국의 전통 산사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됐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등재된 7개 사찰은 부석사(영주), 봉정사(안동), 통도사(양산),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들 7개 사찰은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을 담고 있고, 내·외부 공간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점, 한국 불교만이 갖는 통불교적 사상과 의식이 있는 점, 산사에서의 승려 생활과 산사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점 등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한국의 전통 산사와 승려들의 수행 생활에는 인간 삶에 필요한 유·무형의 소중한 가치관과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극단주의, 물질만능주의, 이기와 탐욕이 갈수록 만연하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더욱 절실한 그 ‘미학’을 조명해 본다.

매화 애호가 사랑받는 유명 古梅
화엄사처럼 오래된 산사에 많아
이른봄 수많은 이들 발길 붙잡아
안분지족하며 성실히 살아가면
행복이 온다고 해마다 말하는 듯
수행자 깨달음 매개체가 되기도


삭막하고 추운(지난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지만)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날이 반갑고 고마운 때다. 이런 좋은 시절이 곧 지나가버릴 것을 생각하며, 기운 생동하는 따뜻한 봄날만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산속 사찰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많은 아름다움과 좋은 기운을 지니고 있다. 철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산사는 특히 자연 풍광과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각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 중 이른 봄날에는 추운 겨울을 견디다 가장 먼저 탐스럽게 피어나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가 사람에게 환희심을 선사한다. 매화 개화 시기는 지역·환경마다 다르지만, 산속 매화는 대부분 지금 본격적으로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유명 고매(古梅)는 대부분 산사에

요즘은 매화를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매화 애호가의 많은 사랑을 받는 이름난 고매(古梅)는 특히 오래된 산사에 많다.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 선암사 고매(선암매), 통도사 홍매(자장매), 백양사 홍매(고불매) 등이 해마다 이른 봄이 되면 수많은 이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고매 중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가 각별히 기다려진다. 맑으면서도 진한 붉은색 꽃을 피우는 이 홍매는 꽃도 홑꽃으로 아름답고 나무 모양도 준수한데다, 주변의 오래된 한옥인 각황전 및 영산전과 어울려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 호젓하게 즐기기 어렵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이긴 하다. 이 홍매는 각황전을 중건할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은 300년이 훨씬 넘는다.

화엄사 부속 암자인 길상암 앞에는 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450년 정도 됐다는 이 백매는 울창한 숲 속에 자라서인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꽃도 드문드문 피우는,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매화나무인지도 모를 자태로 주변의 숲과 어울려 각별한 멋을 선사한다.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으며, ‘화엄매’로 불린다.

선암사에는 오래된 고매가 특히 많다. 원통전 앞 백매는 650년 정도 된 고매로, 지금도 온전한 형태의 나무 전체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꽃이 매우 성글게 피어 더욱 고귀하게 보인다. 이 옆에 무우전 돌담을 따라 300년이 넘은 홍매와 백매 20여 그루가 봄만 되면 진하고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선암사 어느 스님은 이 ‘선암매’가 한창 꽃을 피우면 멀리 떨어진 선암사 입구에만 들어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불매’라 불리는 백양사 홍매는 수령이 3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담홍색 꽃을 피운다. 1863년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을 때,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터에 있던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 같이 옮겨 심었는데,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1947년에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古佛梅)’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慈藏梅)’는 수령 350년의 홍매화로,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도사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이 자장매는 다른 산사의 고매보다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에 매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가장 먼저 끌어들이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깨달음의 기연(奇緣)을 선사하기도 하는 매화

산사의 고매들은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겨울의 끝자락이나 이른 봄철에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수백 년 전에 매화를 심은 스님 덕분이다. 스님들은, 불교 수행자들은 왜 매화나무를 심었을까. 일반 사람처럼 봄소식을 빨리 전해주는데다 꽃도 아름답고 향기가 특별히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것을 넘어 매화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목적인 깨달음을 얻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던 선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것이든 깨달음의 인연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매화는 단순히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는 향기로운 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득도의 기연(奇緣)을 선사하는 대표적인 꽃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로 무명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오도송 ‘심춘(尋春)’이라는 시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실려 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 발로 온 산을 헤매며 구름만 밟고 다녔네/ 돌아와 웃으며 매화가지 집어 향기 맡으니/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遍頭雲. 歸來笑拈梅花臭, 春在枝頭已十分)’

‘돌아와 웃으며 매화가지 집어 향기 맡으니(歸來笑拈梅花臭)’ 대신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歸來偶過梅花下)’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봄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마음의 봄’, 즉 깨달음을 얻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가 사라지는 경지를 체득하면 영원한 봄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아니라도 봄은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에 있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클로버 밭에서 주위에 널려 있는 세잎클로버(행복 상징)는 제쳐 두고, 불행을 가져올지 모를 네잎클로버(행운)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을 키워가야 집 안에 핀 매화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누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매화를 찾아 험한 산을 헤매는 헛수고를 줄이려면 과욕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삶이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매화를 소재로 한 선시 하나를 더 소개한다. 고려 후기 스님인 진각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시다.

‘서리 바람 땅을 휩싸며 마른 풀뿌리 쓸지만(霜風括地掃枯)/ 봄이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誰覺東君令已廻)/ 고갯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唯有嶺梅先漏洩)/ 눈속에서 가지 하나 홀로 피었네(一枝獨向雪中開)’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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