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리안갤러리서 첫 대구展 하태범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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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1   |  발행일 2019-09-11 제22면   |  수정 2019-09-11
“흰색으로 재현한 참혹한 전쟁…재난 소비하는 세태 지적”
미니어처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
색이 주는 시각적 폭력서 벗어나
비극 잊지 말자고 보는이에 역설
“빈집 가득 지방소멸 현장도 관심”
[인터뷰] 리안갤러리서 첫 대구展 하태범
하태범 ‘Facade’

소리 없이 속으로 삼키는 울음은 때론 오열보다 더 애통하다. 모든 색을 제거하고 오직 흰색으로만 화면을 가득 채운 하태범의 작품이 그렇다. 힘이란 더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빼는 것에서 시작된다. 색이 없이도 얼마나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듯 그의 작품은 오직 희고, 희거나, 흰 색들로만 채워져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과 재난 현장을 재현하는 작업을 통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하태범 작가<사진>가 대구를 찾았다. ‘White - facade’라는 제목으로 10월19일까지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첫 대구 전시회를 위해서다.

하씨의 작업은 전쟁과 재난이 벌어진 현장을 보도한 한 장의 미디어 보도 사진에서 출발한다. 테러로 부서진 건물, 지진으로 쓰러진 집, 화재로 불타버린 나무. 거기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참혹하게 망가진 시체가 나뒹군다. 그런 현장을 찍은 보도 사진을 아크릴판, 석고 등을 이용해 원본의 30분의 1 정도의 미니어처로 제작한다. 그가 재현한 미니어처의 공간에는 보도사진에서 보듯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근이 건물 밖으로 튀어나오고 부서진 난간과 기둥이 쓰러질 듯 휘어져 있다. 덜렁거리는 문짝과 형태를 알 수 없는 건물, 찌그러진 자동차도 사진과 똑같이 서 있다. 하지만 그 공간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는 공간에 아픔과 슬픔이 있을 리 만무하다. 공포와 폭력, 낭자한 선혈, 망가진 시체도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미니어처를 그는 ‘완전히’ 하얗게 칠한 뒤 사진으로 찍는다. 본래의 여러가지 색이 전달하는 시각적 폭력성을 하얗게 탈색하고 구체적 요소들을 제거하여 중립적 상태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내 작업은 재난 자체보다는 재난 장면을 ‘가볍게’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문에 실린 재난 사진은 끔찍하고 처참하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무심하다. 흰색을 칠하는 것은 지우는 것이기도 하고 덮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건조하고 냉소적이며 방관자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원본 보도사진을 하얀 모형으로 제작하고 다시 사진으로 촬영하는 작업 과정은 원본의 재현인 듯 보이지만, 실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부분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 곳이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이런 복잡한 작업 방식을 통해 그는 미디어의 의도성과 조작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매체라는 필터링을 통해 접하는 현실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무심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와 금속 재료를 커팅해서 제작한 신작 ‘surface’와 ‘facade’ 시리즈를 선보인다. 건물의 앞면을 위주로 단면을 잘라서 여러겹 쌓아올린 입체 동화책처럼 만든 ‘surface’와 ‘facade’ 시리즈는 드러난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한쪽 면만 보여줌으로써 재현하고자 하는 ‘현실’ 그 자체를 다시보게 만든다.

“미니어처를 제작해서 다시 사진으로 촬영하는 까닭은 3차원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구체적인 형상보다 사진으로 찍은 평면의 2차원적인 이미지가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번 신작에서는 3차원의 공간을 분해하고 중첩시켜 부조형식으로 간결화시켜 풀어 놓았다. 재현된 실재로서의 ‘연극성’을 더욱 부각하고자 했다고 보면 된다. 부수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원본에 변형을 가해 재난의 참혹한 공간을 연극 무대처럼 만든 것이다.”

흰색으로 덮고 지우는 작업을 통해 그는 덮지 말고 지우지 말자며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운다. 앞으로 그는 버려진 집, 비워진 집들이 몰려있는 지방소멸의 현장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아볼 계획이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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