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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의 일상의 시선] 肉筆(육필)의 표정

  •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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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07   |  발행일 2021-05-07 제22면   |  수정 2021-05-07 07:24
대구문학관 '육필전' 마련해
김동리·김춘수 등 45점 전시
문인들이 직접 쓴 원고 통해
그들의 삶 엿보며 소통 기회
우리 문학사 색다른 경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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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대구문학관장

-육필(肉筆)

육필. 문인들이 직접 쓴 원고. 지금은 거의 컴퓨터의 워드 작업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모두 육필로 원고를 썼다. 육필은 타이프라이트와 워드작업으로 옮겨가면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아직도 육필로 원고를 쓰는 고집스러움을 고수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최근 나온 육필집으로는 '김수영의 육필시고 전집'이 꽤 관심을 끌었다. 치열한 글쓰기의 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는 대개 세로줄로 된 원고를 썼고, 원고지 칸을 한 자 한 자 메꾸어나갔다. 줄로 그어 지운 위에 새로 쓰거나 길게 줄로 빼내어서 원고지 가의 여백에다 고친 단어나 문장들을 적기도 했다.

그런 가필과 수정의 자국이 어지럽다. 원고지와 수첩, 메모지 등에 써 놓은 완성본 원고와 초고가 망라되어 있다. 시상 등을 적은 메모도 보인다. 시인이 구술한 것을 부인 김현경 여사가 받아 적은 원고도 있다.

한 작가의 글쓰기의 비밀스러운 단면들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김수영이 그야말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흔적들이라는 점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 지난한 싸움의 결과물로 그의 시가 비로소 활자화가 된 것이리라.

필자는 육필을 두고 과거 문인들의 수공업적인 각인이라 말한 바 있다. '수공업자'란 말은 마라이의 산문 중의 구절을 수첩에 적어놓은 걸 써먹은 걸로 기억한다. 필자도 그렇게 각인한 육필 시선집을 낸 적이 있다.

-인각(刻印)의 흔적들

대구문학관이 마련한 육필전은 각별한 볼거리다. '육肉필筆 손끝에서 손끝으로'라는 주제로 구상 김동리 김춘수 박목월 백기만 신동집 유치환 이상화 이설주 이육사 이윤수 이장희 조애영 조지훈 최태응 등의 희귀한 육필 45점이 전시됐다.

구상의 육필은 이윤수에게 보낸 엽서와 서간이다. 김동리는 '계성문학에 부쳐'라는 모교 사랑을 담은 원고를 보여준다. 김춘수가 유치환에게, 박목월이 정재호에게, 유치환이 정재완에게, 이상화가 아내에게, 이육사가 이원봉에게, 이윤수가 조애영에게, 조지훈이 유치환과 아내에게, 최태응이 윤장근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다. 대표작을 옮겨 쓴 원고도 있다. 이장희의 경우는 백기만이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실린 필적 '박연(博淵)'의 사진본이 유일한 육필로 선보였다.

만년필과 철필로 쓴 글들이 대부분인데, 붓글씨로 쓴 서간도 있다. 백기만이 이상악에게 보낸 서간은 또박또박하면서도 유려한 붓글씨로 쓴 제법 긴 글인데, 내용 중에는 사정이 어려우니 도움을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보여 당시의 딱한 사정을 드러낸다.

이 육필전은 육필을 통해 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됐다. 육필은 문인들의 숨결과 영혼이 담겨 있으며, 문인들의 개성과 육체성도 느끼게 한다.

대구문학관은 자체 자료로 소장하고 있는 문인들의 필적들을 기반으로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 안동의 이육사문학관, 고려대박물관, 통영시립박물관, 시와반시사 등과 연계하여 관련 육필들을 제공받아 다채로움을 더했다. 이 전시를 통해 문인들의 '몸과 정신의 수공업적 각인'이 우리 문학사에 다채롭게 찍힌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시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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