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정리는 '폭력·대결→인권·평화'로 가는 시대전환 가치"

  • 송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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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5 07:33  |  수정 2021-10-25 07:35  |  발행일 2021-10-25 제3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

 
지난 23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주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참석한 정근식 위원장은 "과거사 정리는 대결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가는 시대 전환의 가치"라고 말했다.

영남일보는 지난 8월9일부터 10월18일까지 9회에 걸쳐 '대구경북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란 기획시리즈로 6·25전쟁을 전·후로 대구경북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다뤘다. 3·1운동 당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된 대구형무소를 시작으로 △대구 10월 항쟁 사건 △문경 석달마을 양민 학살 사건 △김천 보도연맹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 사건 △경주 민간인 희생자 사건 △구미·포항·예천 미군 민간인 폭격 사건을 현장 취재해 보도했다. 지난 23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주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참석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정근식 위원장을 영남일보가 단독으로 만나 진실화해위의 성과와 계획 등에 관해 물었다.

2기 진실화해위 접수 사건 중
6·25 前後 민간인 희생 '최다'
대구경북은 960건 규명 신청

지난해 과거사정리법 개정때
배·보상 규정 빠져 아쉬움 커
보도연맹 소멸시효 위헌 주목


▶2005~2010년 활동한 제1기 진실화해위(이하 1기)의 성과는.

"1만1천여 건을 조사해 8천500여 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현대사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사건들에 대해 국가의 책임하에 전국적이고 포괄적인 조사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국가 사과·제도 개선·화해 조치 등 국가에 종합권고 20개, 개별권고 356개를 권고했다. 특히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등 1기 진실화해위가 재심을 권고한 79건에 대해서는 재심을 통해 전원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또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은 이후 배·보상 소송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1기 진실화해위가 희생자로 인정·결정한 1만6천600여 명 중 6천400여 명이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했고, 그 가운데 88%가 승소했다."

▶1기가 진실 규명한 사건 가운데 대구경북의 주요 사건은.

"1기는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피해자 1만2천364명을 진실 규명했다. 그 가운데 대구경북지역 피해자는 1천491명(12.06%)으로, 광주·전남과 부산·경남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잘 알려진 사건으로는 문경 석달마을 사건,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 사건 등이다. 이와 함께 대구·경주·구미·안동 등 대구경북 전역에서 벌어진 국민 보도연맹 사건과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김천·포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군 폭격 사건 등 다양한 유형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진실을 규명했다."

▶10년 만에 2기 진실화해위(이하 2기)가 출범했다. 재출범의 의미는.

"1기 활동에도 미처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못한 분이 많다. 1961년 피학살자 유족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펼쳐진 바 있다. 또 이후로도 계속된 감시와 연좌제 피해 등으로 오랜 세월 유족들이 위축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기 종료 이후 유족과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재출범 요구가 있었다. 이에 더하여 형제복지원 사건 등으로 지난 10년간 사회적으로 새로이 드러난 수용시설 내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활동 등이 진실화해위 재출범의 큰 원동력이 됐다. 2기 출범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각계각층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주어진 다시 없을 기회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사명을 다하겠다."

▶2기 조사 현황은 어떻게 되나.

"10월14일을 기준으로 1만423건(신청인 1만2천184명)이 접수됐다. 지난 5월27일 첫 조사 개시 결정 이후 지난 10월13일 10차에 걸쳐 누적 5천100여 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이 이뤄졌다. 전체 신청 접수 사건 중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6천538건으로 비중이 가장 높다. 대구경북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은 960건의 진실규명 신청이 접수돼 그 가운데 733건에 대해 조사가 시작됐다."

▶지난 7월 영덕 보도연맹 사건 유족들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이 있었다. 2009년 1기에서 진실을 규명한 사건인데, 배·보상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안타깝게도 배·보상 문제는 진실화해위가 결정하지 못한다. 진실규명 결정 결과를 가지고 개별 소송을 통해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심지어 소멸시효 문제로 패소하는 때도 있다. 이미 사건으로부터 70여 년이 흘렀다. 유족들 대부분 80·90대의 고령이다. 지난해 과거사정리법 개정 당시 배·보상 규정을 포함하려 했으나 관철되지 못해서 유족들이 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영덕 국민 보도연맹 사건 판결의 경우, 과거사 사건 피해자의 국가 배상청구권에 민법상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2018년 헌법재판소 위헌결정이 중요한 근거가 됐다. 소멸시효에 대한 이 같은 헌재 판결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진실화해위에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

▶대구경북에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유해 매장 추정지가 많다.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

"유해 발굴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관련 증거를 확인해 실체를 규명하고 유족의 해원을 돕는 등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경산 코발트 광산 등 10개소(13회)에 대해 유해 발굴을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경산 코발트 광산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유해들도 많이 있다. 현재 행정안전부는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 단위 위령 시설' 조성을 진행하고 있다. 2024년까지 약 40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할 예정이다. 2기 진실화해위는 유해매장 추정지 실태조사와 함께 유해 발굴 종합계획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 연도별 실질적인 유해 발굴을 도모하고,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 이후에도 지속해서 유해 발굴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할 계획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겠다. 왜 우리 사회에 과거사 정리가 필요한가.

"과거의 피해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그렇게 오래된 일을 그렇게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의 고통과 그날의 진실을 직면할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회적 낙인 속에서 긴 세월 침묵을 강요받은 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이다. 과거사 정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인권과 정의의 기준을 확인하는 현재의 일이다. 그리고 진실 없는 화해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미래의 일이기도 하다."

▶영남일보가 6·25전쟁 전·후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사건을 다뤘다.

“언론에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현장 취재와 보도로 국민의 이해를 돕고, 진실을 규명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이런 차원에서 영남일보의 아픈 역사의 현장 취재·보도는 국민의 이해를 돕고, 대구·경북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여러 설이 있는데 심지어 1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한 세월이 길었지만, 알고 보면 모두 우리 가족의 일, 우리 이웃의 문제다.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은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면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괴롭히는 현재의 문제다. 더이상 과거사가 우리 공동체의 통합을 발목 잡지 않게 해야 하는 이유로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사 정리는 폭력의 시대에서 인권의 시대로, 대결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가는 시대 전환의 가치다. 진실의 문을 열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해 국가적 책임을 다하겠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교수(문학박사)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100년사 발간위원장 △세계인권도시포럼 기획위원장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원장 △서울대 평의원회 의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장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글·사진= 송종욱기자 sj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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