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고속도로 가족' 기우역 정일우 "노숙인 변신 위해 외모부터 과감히 망가졌다"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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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11 08:35  |  수정 2022-11-11 08:39  |  발행일 2022-11-11 제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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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이만 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기우네 가족은 오늘도 휴게소 방문객이 건네준 돈으로 어렵게 끼니를 해결한다. 여행객들이 잠시 들러서 먹는 휴게소 음식이 바로 이들의 주식이다. 가족은 언제나 하나로 똘똘 뭉쳐 살아야 한다고 믿는 기우는 아내 지숙(김슬기), 두 아이 은이(서이수), 택(박다온)과 함께 5년째 거리 위의 삶을 살고 있다. 남루하고 척박한 삶이지만 항상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이상한 가족, 영화 '고속도로 가족'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들 가족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영화 '내 사랑'(2007) 이후 15년 만에 관객 앞에 선 배우 정일우가 기우를 연기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스크린 복귀를 원했던 그에게 딱 부합하는 역할인 셈이다. 정일우는 낙천적이고 능글맞아 보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색다른 긴장감을 형성하는 기우에게 단번에 매료됐다. "영혼을 갈아 넣으며 촬영했다"고 표현했을 만큼 흠뻑 빠졌다. 대신 감정의 낙차가 큰 기우를 소화하기 위해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얼굴까지 꺼내 보이며 철저히 준비에 임했다. 기존의 '꽃미남' 이미지에 반하는 외적 변신은 물론 극단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놀라운 연기 스펙트럼이 그렇게 완성됐다. 보다 다채롭게 펼쳐질 그의 이후 행보를 주목해 본다.

배역의 내면과 행동 납득하기 위해 깊이 고심
다큐멘터리 보면서 분장팀과 외형모습 상의
양치질·세수만 하고 수염 두달간 다듬지 않아

▶영화에선 기존에 맡았던 역할과 결이 다른 캐릭터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는데 '고속도로 가족'은 어떤 점에서 부합했나.

"이미지 변신을 위한 변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사실적이면서도 새로운 것들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 '고속도로 가족'은 독특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주는 힘이 있는 한편으로 파격적인 캐릭터라 잘 해내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영화를 찍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절로 의지가 불타오르더라. 그래서 더 치열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다행히 영선 역의 라미란 선배가 나와 다른 축에서 중심을 잘 잡아주고 계셨기 때문에 밸런스적인 부분에서 안정적이었다. 덕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미지 변신과 극단을 오가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임신 중인 아내와 취학 연령의 아이들에겐 무엇보다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필요한데, 기우는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거리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매 작품 스스로 분석한 캐릭터의 전사(前事)를 노트에 적는다.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해야만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우도 처음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믿고 의지했던 형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이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됐다. 그런 기우에게 유일하게 남은 건 가족이다.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노숙 생활을 하면서 점차 그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늘만 살아간다. 두 달 정도 감독님을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자료도 찾아보면서 준비했다. 아이들과도 자주 만나고 (김)슬기씨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기우가 돼 있었다."

▶정일우 배우의 의견이 반영된 설정도 있었나.

"있다. 기우는 영선의 가족 때문에 자신의 공동체가 붕괴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다시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이 때문에 극단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또 기우가 휴게소 방문객들에게 다가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2만원을 빌리면, 잠시 후 아이들이 가세한다. 그 지점이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여서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그런 행위조차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게끔 만들고 싶었다. 기우가 빌런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가족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게 가족을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답을 구했다.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데'라는 극 중 기우의 대사를 통해 행동의 당위성도 만들어줬다."

▶뛰고 구르고 흙칠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겠더라.

"육체적으로 힘든 건 기꺼이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캐릭터의 상처와 아픔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번만큼 감독님과 소통을 깊게 자주 했던 적은 없었다. 기우는 감정 기복이 힘들고 조금만 다르게 표현해도 최종적으로는 큰 차이가 나는 인물이다. 나를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역할이고, 나 역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나의 끝은 어디일지 그 끝을 찾고 싶었다. 앞서 '영혼을 갈아 넣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영혼을 갈아 넣겠나 그냥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나는 끼가 많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준비한다. 그렇게 파야만 그 캐릭터가 된다고 생각한다."

▶외적 변신도 눈길을 끈다.

"솔직히 더 가려고 했다. 초반 멀쩡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우가 사람들에게 돈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노숙인처럼 하고 있으면 돈을 안 빌려줄 것 같고, 처가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돈을 빌리기 때문에 앞부분에서는 조금 조절했다. 그 이후부터는 더 망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분장팀과 맞춰보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고했다. 머리나 수염은 두 달 가량 건드리지 않았다. 눈뜨면 간단하게 양치질과 세수만 하고 촬영장에 나갔다. 그래선지 휴게소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 덕분에 기우처럼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고 편하게 앉아 있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한번은 우연히 유아인 형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일우야, 너 왜 이러고 다니냐'고 걱정하더라."(웃음)

▶영화를 찍으면서 스스로 발견한 본인의 새로운 얼굴이 있었나.

"10여 년 만에 영화를 찍었는데, 이 영화를 찍기까지 대중이 갖고 있는 정일우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다는 갈망이 오랫동안 쌓여왔다. 그래서 이 작품을 할 때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이 작품을,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런 마음이 장면 장면에 다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다. 흥행 여부를 떠나 대중이나 관계자들에게 정일우의 이미지가 바뀌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뿐이다."

▶이미지가 바뀌면 좋겠다는 것은 제안받는 역할이 제한적이기 때문일까.

"그렇다. 재벌 집 아들이나 꽃미남, 이런 역할들이 많이 들어온다. 내 나름대로 여러 변화를 준다고 줬는데, 워낙 '거침없이 하이킥' 윤호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 배우가 안주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고 발전해 나가는구나 알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크다."

▶언급한 것처럼 데뷔작 '거침없이 하이킥'(2006)은 배우 정일우의 필모그래피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따라붙는 꼬리표가 될 것도 같다.

"배우에게 대표작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 작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기 때문에 나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이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지울 순 없다. 또 그 작품은 이미 레전드가 됐기 때문에 지울 수도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보고 이야기하더라. 벌써 16년이나 지난 작품인데 아직도 사랑해 주시는 게 정말 감사하고 신기하다. 솔직히 더 오래오래 회자됐으면 좋겠다."

캐릭터 집중 위해 휴게소에서 자주 널브러져
우연히 만나게 된 유아인 형도 놀라서 걱정해
찌질남·악역 통해 연기 스펙트럼 더 넓히고파


▶그때 배우 정일우의 초심은 무엇이었고, 지금 마음가짐은 어떻게 달라졌나.

"연기의 '연' 자도 모르고 할 때라 순수함이 그립긴 하다. 하지만 초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끼 많은 배우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분들에 비하면 미비하다고 생각한다.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어디 가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그걸 깨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작품 할 때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또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티가 난다. 내가 봐도 그럴 때가 있다. 그 마음도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간절함도 여전하다. 아니 간절함은 더 생긴 것 같다."

▶어느덧 데뷔 17년 차다. 앞으로는 어떻게 채워나가고 싶나.

"매 작품을 통해 나 스스로는 조금씩 성장해 왔다고 생각한다. 나 나름대로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남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여전히 기존 (꽃미남)이미지에 딱 갇혀 있었다. 대중들의 생각이 나와 같을 수는 없기에 혼자만의 만족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궁금했다. 다행히 보신 분들이 이 작품을 선택한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초반에는 정말 정일우인지 몰랐다는 반응과 함께 따뜻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임팩트도 세고 충격적이었다며 하길 잘했다고 해주셔서 뿌듯했다. 용기가 생겼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앞으로 더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 찌질한 역할도 해보고 싶고 악역도 해보고 싶다. 조금 더 유연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제이원 인터내셔널컴퍼니·9아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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