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영화] 혜옥이, 6년째 행시 고배…기대 부응 못한 청춘의 슬픈 자화상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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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09 08:51  |  수정 2022-12-09 08:55  |  발행일 2022-12-09 제39면

혜옥이

명문대를 졸업한 라엘(이태경)은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안정적인 직장의 상징인 공무원이 되기를 바란 엄마(전국향)의 의중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 IMF 때 아빠와 이혼 후 힘들게 자신을 뒷바라지해 온 엄마는 딸에 거는 기대가 크다. "넌 최고니까, 일류니까, 다 할 수 있어"라는 엄마의 응원에 힘을 얻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두 모녀가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을 둘러본다. 모두가 합격해서 나갔다는 중개인의 말에 반색한 엄마는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원룸을 계약한다. 하지만 2년 안에 합격을 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N수생이 된 라엘. 점점 자존감이 떨어지는 그녀에게 엄마는 개명이 필요하다며 '혜옥'이라는 새 이름을 받아온다.

천천히 눈을 비비고 다시 떠 보아도 주변이 칠흑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행시 2차에서 계속 고배를 마신 혜옥에겐 작금의 상황이 어찌 보면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고 암담한 현실일 수 있다. 영화 '혜옥이'는 6년 동안 행시 준비를 했던 공동 각본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단순히 고시 준비생의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겪어본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공감을 통한 치유까지 가능한 몰입감을 선사하기 위해 느릿느릿하게 가라앉는 혜옥의 내면에 천착한다.

'혜옥이'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 실내극에 가깝다. 이 공간은 제약이 아니라 긴장과 압박감을 쌓는 최적의 장소다. 원룸과 독서실 그리고 식당을 배경으로 파생되는 모든 상황과 행동, 소리는 서스펜스의 재료로, 또 혜옥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 작용과 원리로 활용된다. 요란한 사건이나 직설적인 대사 없이 계속해서 어긋나는 상황들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시간을 또렷하고 생기 있게 포착한 건 미덕이다. 이를 통해 딸에게 기대와 희망을 건 엄마와 엄마의 욕망이 주입되어 하나의 목적에 매달리는 혜옥의 고립과 불안, 부담과 공감을 모녀의 관계성에서 오는 숨 막히는 공포로 그려냈다.

자칫 평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주제라는 점에서 뭉근한 위로를 건넨다. IMF를 겪은 포스트 IMF 세대의 트라우마, 믿고 기댔던 모녀 관계의 비뚤어짐에서 파생된 트라우마, 도전하지만 보상받지 못하는 실패에서 오는 트라우마 등이 이야기에 적절히 녹아있다. 연출을 맡은 박정환 감독은 "타인의 뒤틀린 욕망에서 파생된 변질된 믿음 그리고 그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세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장르:드라마 등급:12세 관람가)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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