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천하제일의 문장 '신유한', 서얼로 태어난 문장 천재…日 문인들 환생한 두보 칭송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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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26  |  수정 2023-05-26 07:37  |  발행일 2023-05-26 제35면
기해통신사 제술관 뽑혀 일본행

에도성 도시화 과정 생생한 기록

'열하일기'와 함께 사행기록 쌍벽

동아시아 전역에 이름 퍼질 정도

대표 詩 '제촉석루' 영조도 극찬

낙향 후엔 경운재 지어 후학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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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에도성 입성도.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청천 신유한(1681~1752)은 18세기 동아시아를 풍미한 영남 서얼 출신의 문장가이다. 서얼에게 과거 문이 열리자 진사시에 장원하고 증광시에 급제했지만 벼슬길은 평생 한직과 벽촌 현감에 머물렀다. 경계 밖의 인물이었지만 천하제일의 문장은 조선을 들쑤셨고 명성은 구비전승의 설화를 낳았다. 1719년 39세 때 기해통신사 제술관으로 뽑혀 오른 일본사행 길에 6천여 편의 글을 지어 일본 전역에 뿌렸다. 가는 곳마다 그의 글을 청하는 이들로 장사진을 쳤고 앉은 자리에서 수백 편의 시문을 단숨에 써 내려가 일본문인들을 감탄케 했다. 그의 사행일기 해유록은 일본 문물과 풍습을 사실화처럼 기록해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사행기록의 쌍벽을 이루었고 오늘날 청천을 연구한 학술논문은 백 편이 넘으며 조선 후기 박제가의 북학(北學)에 대비하여 신유한의 화학(和學·일본학)이라고 젊은 사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신유한 생애

청천은 밀양 산외면 죽동마을에서 태어나 혼인 후 처가 동네 고령 개진으로 이사했다. 조부·백부·생부가 모두 글이 뛰어나 밀성삼가라 불렸고 25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자 문재가 한양도성에 회자됐다. 부친상을 마치고 33세에 대과 급제하자 예조판서 민진후는 그의 글을 보고 간세(間世)의 영재라 했고 진사시 시권(답안지)을 영의정 최석정의 아들, 대사성 최창대가 굴원의 초사(楚辭)에 비견된다고 했다.

등과 3년 후 겨우 교서관 보직을 받았고 내직으로 신분제약이 덜한 봉상시(왕실제사담당) 관리로 일생을 보냈다. 외직은 통신사 제술관으로 명성을 떨치자 참상으로 승진하여 41세에 연천현감으로 나갔고 65세에 연일현감을 지냈으니 평생 다섯 고을의 현감만 맡았다. 청천의 문장은 견줄 이가 드물고 쇠퇴하는 세상을 뛰게 하려면 서얼이지만 중용해야 한다며 일흔의 나이 청천을 봉상시 3품에 보임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낙향하여 가야산 기슭에 고운 최치원을 사모하는 경운재를 짓고 가야초수(늙은 초부)라 칭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72세에 세상을 떠나 고령 쌍림에 묻혔다. 사후 20년 뒤 제자인 경상감사 이미가 경상감영에서 문집 청천집을 발간할 때 온 나라에서 문집을 찾는 이가 쇄도해 목판이 다 닳아 문드러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제촉석루(題矗石樓)

제촉석루는 촉석루의 아픔과 풍광을 노래한 청천의 대표 시이다. 예로부터 조선 선비는 글 속에서 이백과 두보를 만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장강 만 리를 누비고 강남의 3대 누각인 악양의 악양루, 우한의 황학루, 난창의 등왕각을 오르며 그 절승을 노래한 두보의 등악양루, 이백의 황학루송, 왕발의 등왕각서를 읊어왔다. 그러다가 제촉석루가 나오자 조선 선비들은 비로소 그들에게 비견되는 동국 절승시가 나왔다고 감탄하며 이를 찬미했다.

3천명이 넘는 시인 묵객이 이 시에서 차운하여 시를 지었고 그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졌다. 영조는 경연장에서 조정 신하들이 삼삼오오 모여 제촉석루의 절품에 관해 쑥덕거리는 것을 보고 그 친구 정말 글 잘 짓고 문장이 뛰어나다며 청천의 문재를 칭찬한 글이 승정원일기에 나와 있다. 오늘날 촉석루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시가 제촉석루이다. 8행 중 전 4행이다. "진양성 밖 남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대숲과 난초의 푸르름이 강물 위에 비치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천하의 삼장사/ 지나가는 길손의 발길을 우뚝 솟은 누각으로 이끄는구나.(晉陽城外水東流 叢竹芳蘭綠暎洲 天地報君三壯士 江山留客一高樓)"

◆신유한 문장

신유한은 초사를 수만 번 읽었다고 한다. 초사는 초나라 대부였던 굴원이 추방당한 후 유랑하면서 쓴 장편 서사시로 천고에 빛나는 낭만주의 걸작이다. 동아시아 선비들이 짚방석에 앉아 울분을 삭이고 미래를 기약하며 읊조리는 시이다. "길은 끝이 없고 멀기도 멀도다. 날이 새면 저 맑은 백수를 건너 낭풍산에 말 매고 쉬랬더니 가다가 돌아보면 흐르는 눈물, 아 이 산에도 미녀가 없네"라고 굴원은 노래했고, 신유한은 벽촌현감으로 전전하면서 "아전은 궁핍해 몸에 이가 생기고, 군졸은 말라 등에 구더기가 생겨나네. 분주한 사절에 격문을 옮기고 부엌을 긁어 사신을 대접하네. 백성을 살펴보니 눈물만 나고 눈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병폐뿐"이라고 말단관리와 백성의 아픔을 읊었다.

8품 저작으로 제술관에 뽑히자 그동안 백가지 파란과 모욕, 고생을 다 겪었는데 또다시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득한 바닷길로 나서게 됐다고 했다. 그는 몰락한 잔반(殘班), 소북 계열의 학맥으로 평생을 경계 밖에 살았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뱃속에는 오 천의 글(五千言)을 돌무더기처럼 쌓아놓았다고 자부하면서 서얼차대 세상을 향해 일본 사행 길에서 통렬하게 글을 뿌렸다.

◆해유록(海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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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의 해유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유록은 1719년 4월11일부터 이듬해 1월24일까지 261일 동안 조선통신사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신유한의 사행일기이다. 정사 홍치중, 부사 황선이며 황선은 훗날 경상감사로 정희량의 무신년 반란을 진압하여 대구읍성 남문 밖의 평영남비에 새겨진 인물이다. 사행인원은 475명으로 당상 역관, 무관, 서기 등이 있었지만 왕명으로 임명된 제술관은 세 사신 다음가는 중요한 자리였고 신유한은 역대 최고의 제술관이었다. 그는 일본 지리, 풍습, 물산, 제도, 인성 등을 날카롭게 관찰해 부록으로 문견잡록을 첨부했다.

해유록은 신유한의 문장이 여지없이 나타나 있다. 부산 영가대의 해신제, 6척의 화려한 사행선 묘사, 쓰시마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의 인상, 도요토미의 조선침략 거점도시 오사카 모습, 후지산과 하코네의 풍광, 18세기 에도성의 입성기 등은 마치 슬라이드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현대문학처럼 빼어나다. 열하일기는 담백하고 해유록은 화려하다. 오늘날 조선통신사의 재현 행사와 해신제, 사행선 복원에 큰 도움을 줬다. 영조는 그 후 사절단이 다녀올 때마다 청천이 갔을 때와 어떻게 다르더냐고 물었지만 조선시대 일본에 관한 최고기록 해유록을 국정에 활용하지는 못했다.

신유한은 몰랐지만 해유록 속에는 오사카, 나고야, 에도를 중심으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필연적인 역사산물,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은 양란(왜란·호란) 이후 백 년이 지나 겨우 나라가 안정을 찾아가는 숙종 말엽이었지만, 일본은 유럽 상인이 상주하고 오사카에는 다리가 이백 개가 넘고 약국과 출판사가 있었으며 서점에서는 조선과 중국 서적을 버젓이 팔고 있었다. 아울러 상인 수공업자 거간꾼이 전국에 널려 있어 물산의 풍부함과 도시의 번화함이 에도는 오사카의 3배라 하니 이미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상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린이가 칼을 차는 무의 나라였고 주요 벼슬은 세습이었으며 대마도주나 관백조차 글을 모르는 무식한 나라라고 폄훼했지만 도량이 좁고 기묘한 것,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큰 칼로 사람을 베는 잔인함을 무사도라 여겨 받드는 우리와 너무도 다른 인성을 정밀하게 찾아냈다.

◆일본을 진동시키다

사절단이 규슈에 도착할 무렵 신유한 이름은 일본 전역에 퍼졌다. 4개월이 채 안 된 8월7일 일기에 글 청하는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책상 위에는 종이가 가득 쌓였고 써내면 다시 모이니 점점 불어 낟가리처럼 됐으며, 모두 글을 갈망해 두 손을 이마에 곧추고 빌어대니 잘된 것 못된 것을 논할 수 없다고 했다. 오사카에서는 찾아오는 이들로 숙소가 막혀 식사를 거르고 밤중까지 써 내려가기가 일쑤였고 제술관의 임무는 글로써 교화하고 국위를 선양해야 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천 리 밖에서 아버지와 함께 청천을 만나러 오는 어린 학동이 허다했고 왜인 관리들은 출입통제를 빌미로 글 청하는 이들에게 뇌물을 받기도 했다. 에도에서는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미처 먹을 갈아대지 못했고 왼손으로 인사하고 오른손으로 써내려 간 그대로일 뿐 다듬을 겨를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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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여행작가·역사연구가)

청천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가 일본에서 만난 인물은 관백을 위시해 수천 명이었고 당시 주고받은 글을 묶은 창화집(唱和集)에 따르면 동시대 일본문사 대부분을 만났다. 일본문인들은 신유한을 이백과 두보가 다시 나타났다고 칭송했고 에도막부에서 학문을 관장하던 태학두 하야시 보우코는 76세 고령임에도 일곱 번이나 신유한을 방문하여 존경과 교분을 이어갔다. 18세기 저명한 일본문인 문집에는 대부분 신유한의 글이 실려 있다. 오늘날 일본 전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그의 글은 일세를 풍미한 조선선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 사행 길에 머문 가미노세키성의 성주 별장 앞에는 그가 써 준 두 편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평생 귀천의 굴레 속에 미관말직으로 전전했지만 빼어난 문장은 벼슬의 경계를 뛰어넘었고 명성은 조선팔도에 구전설화로 윤색됐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이 아꼈고 영남의 큰 인물, 청대 권상일 식산 이만부와 교유했다. 해유록은 북한과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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