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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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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형 (문화평론가) |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브리콜라주'라는 개념을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글 속 부족원들이 매우 한정된 자원(문명사회에서 건너온 잡동사니나 자연 재료들)만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을 보고 착안하였는데, 뒤에 이 개념은 심리학자들에게도 널리 인용된 바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이 역경을 극복하는데 있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능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브리콜라주의 정신'이다. 역경이라는 감옥의 열쇠는 절대 도달 불가능한 곳에 있지 않다는 것. 항상 현재 자신의 손이 미칠 수 있는 것들의 조합, 그것만으로 충분히 돌파를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열린 WBC에서 야구대표팀은 1라운드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의 노메달 수모 이후 연이은 참사라 더욱 뼈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전과는 달리 이번 대회에서는 연이은 패전에도 팬들이 그다지 분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한마디의 푸념으로 요약이 되는 분위기랄까. "투수가 없는데 어쩌라고?" 맞다. 지금 한국에는 투수가 없다. 예전에 우리 대표팀에는 구대성, 박찬호, 류현진, 오승환이 있었다. 그만큼의 이름값은 아니지만, 8년 전인 1회 프리미어12 대회까지만 해도 차우찬, 정우람, 정대현, 이현승 등 어떡해서든 1~2이닝을 버텨줄 베테랑 투수들이 여럿 포진하고 있었다. 그 대회 준결승에서 거둔 4-3 기적의 역전승은 애초 일본의 강타선을 고작 1자책(3실점)으로 막아준 그들의 노련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라에 투수 씨가 말라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혹자는 2002년 월드컵 열풍 때문에 야구계에 투신하는 인재가 부족해졌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대책 없이 엘리트 체육에서 탈피하면서 선수 양성에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스포츠를 할 청년들의 숫자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일 테다. 이점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몰락이 비단 야구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농구도, 배구도, 투기 종목도 다 예전 같지 않다. 지난 도쿄 올림픽의 총 메달 개수는 20개, 이것은 무려 45년 전인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WBC 대회에서 변화의 희망도 봤다. '토미 현수 에드먼'의 발탁 때문이었다. KBO가 발 빠른 행보를 보여 수준급 메이저리거인 그를 합류시킨 것은 분명 칭찬해 주어야 할 대목. 그 외에도 최초의 입양아 출신 메이저리거 '롭 레프스나이더'(김정태)나 하프코리안 '데인 더닝'도 합류가 기대되었으나 각각 아내의 출산과 부상 때문에 소집 직전 참가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자 프로배구에는 '염어르헝'이 데뷔했다. 몽골 출신인 그녀는 국가대표 세터 염혜선의 부모님에 의해 입양되면서 작년 10월 귀화까지 마쳤다. 195㎝의 키는 국내 선수 중 가장 큰 신장으로 알려졌는데 김연경, 양효진, 김수지가 모두 은퇴한 여자배구 대표팀으로서는 앞으로 그녀에게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여자프로농구에서는 작년 키아나 스미스가 활약을 시작했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스미스는 WNBA에서도 2라운드에서 지명될 만큼의 유망주. 본인의 의지도 있는 만큼 앞으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여 큰 힘을 실어줄 선수다.
대한민국, 이제 브리콜라주로 역경을 극복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이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면 주저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우리의 손이 닿는 한, 세계 방방곡곡의 훌륭한 청년들과 언제든 용기 있게 악수하자. 그리고 그 새롭고 창조적인 조합으로 다시 한번 승리를 위해 나아가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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