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촉니 린포체는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타라 브랙은 '쓰지 않는 마음'에서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즉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생각과 느낌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담긴 메시지와 그에 대한 해석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이해는 실제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주관적 해석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 왜곡된 믿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자신은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존재이고,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텅 빈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허무한 존재라는 믿음이다.
짜증이나 근심, 우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 그 감정을 잘 살펴보면 그 감정 아래 결핍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허무감과 같은 무기력한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과 무기력한 느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무가치한 존재이고 허무한 존재라는 믿음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과 무기력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생각과 느낌이 아니라 그 생각과 느낌을 자각하는 존재가 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진실이다. 지금 잠시 멈추고 일어나는 마음을 자각하는 그 마음을 지켜보라. 소리와 느낌,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자각 그 자체를 지켜보라.
자각은 형태도 없고 경계도 없으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공간이다. 자각은 아무런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 안에는 변화하는 흐름을 인식하는 깨어있음으로 가득하다. 자각은 언제든 열려있고, 깨어있으며, 즉각적인 감응성을 가지고 있다. 자각의 즉각적인 감응 능력은 사랑과 연민, 기쁨과 감사를 비롯한 다양한 긍정적 느낌으로 나타난다.
부정적 생각과 느낌을 나라고 여기면 나는 이 세상에 우연히 나타났다가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허무한 존재라는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생각과 느낌이 아니라 그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는 광대한 자각의 공간이라면 나는 결코 허무한 존재가 아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머나먼 우주에서 왔고, 나의 마음은 그 우주가 펼쳐지는 광대한 공간이다. 한자경은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에서 자각의 광대한 공간을 확인한 마음은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도 그것이 가유(假有)임을 알기에 더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각의 공간에서 중생을 따라 다시 꿈의 세계로 돌아와 함께 꿈을 공유해도, 그것이 꿈이고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꿈속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경지, 즉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대자유의 경지다.
불교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말하는 것은 마음이 만든 가상을 실재로 여기는 오류, 즉 가아(假我)와 가법(假法)을 마음 바깥의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으로 여기는 집착을 깨기 위한 것이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우리의 마음이 만든 가상에서 우리 의식에 가려진 광대한 자각의 공간, 가상 너머의 실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아(我)가 실재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객관세계라고 집착하는 법이 실재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 아와 법이 모두 내 마음이 만든 가상이고 가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자각은 깨어있음, 개방성, 부드러움이라는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햇살 가득한 하늘과 같다. 태양의 밝은 빛은 어디나 밝게 비추고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다. 두 종류의 행복이 있다. 하나는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릴 때, 날씨와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내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이루어진다. 또 다른 행복은 이런 외적 환경과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이런 조건 없는 행복은 오직 우리가 깨어있는 자각 속에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느낀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지금 마음속에 짜증이나 근심, 우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가? 그러면 그 감정에 대고 조용히 말해보라.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라고.
(대구교대 명예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