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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법학교육과정에는 미국 법률가들이 상당히 많다. 법학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한국법과 함께 미국법 및 국제법을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20명이 넘는 법학 교수 중에 한국어로 한국법을 강의하는 교수는 대여섯 명에 지나지 않아 때때로 나는 미국 대학의 한국법 과정에 취직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과 살다 보니 법이나 법학에 관한 기본적인 관점 또는 이해에 관하여 미국 법률가들과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다른 점을 확인해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자유와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 차이다.
앵글로색슨적 관점에서는 자유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프라이버시라는 자유에 관한 독특한 공간적 관념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떠한 간섭도 없는 자신만의 사적 공간에서 주체는 그야말로 아무런 제약 없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 앵글로색슨적 관점에서 자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
이런 생각은 권리에 대한 이해에도 이어진다. 앵글로색슨적 관점에서 권리란 특정한 범위에서 법의 보호를 받는 주체의 정당한 권능이다. 따라서 권리는 근본적으로 있거나 없거나의 문제이며, 만약 주체에게 권리가 있고, 그 권리가 행사되었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법의 보호를 받는다. 이때 권리의 내용이나 권리의 상대방이나 권리가 행사되는 맥락이나 그 예상되는 결과 등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이해는 다른 문화적-이념적 전통에서 자유와 권리를 관념하는 방식과 큰 차이가 난다. 비앵글로색슨적 관점에서 자유는 복수의 경쟁을 하는 목적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자체로서 내재적인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상황에 따라서, 상대방에 따라서 그리고 예상되는 사회적 결과에 따라서 반드시 적절하게 행사되어야 한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익숙한 명제는 이와 같은 이해를 단적으로 대표한다.
자유에 대한 다른 관념은 권리에 대한 다른 이해로 이어진다. 여기서 권리는 있거나 없거나의 문제라기보다는 평등, 정의, 연대성과 같은 가치들 사이에서 균형을 갖추어 실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체가 그러한 균형을 도외시하거나 깨뜨린다면, 심지어 법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권리의 행사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따라야 하고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되며, 권리행사의 결과까지도 비례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 이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꾸 더 꼬여 가기만 하는 정국을 관찰하면서 나는 문득 내가 살아가는 일상공간에서 경험해 온 자유와 권리에 대한 앵글로색슨적 이해를 떠올리게 되었다. 집권세력의 일방통행이나 여소야대의 국회 의석분포나 언론에 관하여 정치세력들이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1년이 넘도록 정치적 교착상태가 이어지는 데는 더욱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에 관하여 도하 언론의 분위기는 대체로 여야 정치지도자들의 정치력 부족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더욱 깊은 차원에서 원인을 찾자면, 당연히 자유와 권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해와 그 변화 추이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앵글로색슨적 관점이 지금 이 나라의 권력 주변에 출몰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다.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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