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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유메부타이. |
'유메부타이(夢舞台)', 꿈의 무대라니. 그것도 안도 다다오가 꾼 꿈이란다. 게다가 '빛의 교회'와 짝이라도 맞춘 듯이 '물의 절'도 있었다. 오사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아와지시마(淡路島), 즉 아와지 섬의 안도 다다오 건축물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까짓것. 세상에 정해진 게 어디 있나? 하루 더 있으면 되지. 하고 그냥 일정에 밀어 넣었다.
아와지 섬은 본토 혼슈(本州)와 남쪽 시코쿠(四國)를 잇는 길쭉한 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효고현에 속한다. 북쪽, 동쪽, 남쪽에 각각 아카시 해협(3.6㎞), 기탄 해협(4.7㎞), 나루토 해협(1.4㎞)이 두르고 있고, 동북쪽으로는 오사카만과 맞닿았다. 13만명 정도가 사는 섬 안에는 북쪽에서부터 아와지시, 스모토시, 미나미아와지시 등 세 개의 시가 있다. 면적은 제주도의 3분의 1인데 철도도 없는 섬인지라 대중교통으로 다니기가 만만치 않다. 우리 일행은 기사 딸린 미니버스를 렌트하여 아와지시마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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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지 휴게소에서 바라본 아카시대교. |
고베를 지나자 아카시해협 위로 새하얀 다리가 보였다. 전체 길이 3.9㎞, 현수교 구간 1.9㎞로 작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던 '아카시대교'다. 다리에 오르니 파도를 나르는 바람이 미니버스를 세차게 밀어붙인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바람은 더 거세지다 섬이 가까워지자 겨우 잦아든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쉬어가라는 듯 아와지 휴게소가 나타났다. 사방을 유리로 두른 덕분에 오사카만의 파노라마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휴게소에 대관람차도 우뚝 서 있었다. 어쨌든 이 휴게소는 아와지시마의 첫 번째 볼거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 건국신화에는 이 섬이 본토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전한다. 고대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남매지간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하늘에서 내려와 결합해 일본의 여러 섬을 하나씩 출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맨 처음 생겨난 땅이 바로 '아와지(淡路)'이다. 최초의 섬인 셈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이자나기진구'도 이곳에 있다. 이런 신성성 때문일까. 이 해협은 섬을 보호하듯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에 이곳을 지나던 배가 전복되어 304명이 실종되었고, 그 10년 뒤인 1955년에도 165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고로 대교 건설 여론이 높았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1998년에야 겨우 매단 다리, 현수교가 완공되었다.
어쨌든 아카시대교 덕분에 섬의 접근이 쉬워졌다. 유메부타이는 휴게소에서 멀지 않았다. 안도 다다오 특유의 견고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모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섬에 유메부타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섬의 훼손 때문이었다. 1950년대 오사카 앞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을 위해 이 섬의 땅을 깎아냈고, 또 1980년대 말에는 간사이 국제공항을 짓는다며 암반까지 파헤쳤다. 이로 인해 섬의 '나다야마(灘山)' 산 대부분이 사라졌다.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자연 훼손을 복구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맨살이 드러난 땅에 나무를 심고 녹지공원을 만들었다. '국영 아카시해협 공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섬을 관장하는 효고현(兵庫縣)은 이 부지에 자연 회복을 상징하는 시설을 짓기로 했다. 그 책임자로 낙점된 건축가가 안도 다다오였다. 그는 "파괴된 자연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서 동식물 생태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불가능의 공간, 즉 꿈의 무대를 창조한다"는 계획이었다.
아카시대교의 개통에 맞추려 한창 공사를 진행하던 1995년 1월17일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내리는 엄중 경고 같은 이 지진의 진앙지는 공사 현장 바로 인근이었다. 검사 결과 여러 개의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급하게 설계를 변경했고, 공사 기일도 늘어났다. 유메부타이는 대교 완공 2년 후인 2000년 3월 '아와지 꽃박람회'에 맞춰 완공되었다.
유메부타이는 3만평의 넓이에 호텔을 갖춘 리조트, 원형 회랑과 국제회의장, 분수 풀장, 계단 정원 백단원(百段苑), 열대식물을 키우는 아와지 그린하우스, 산책로와 야외극장까지 볼거리가 풍성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특유의 콘크리트 벽면이 만들어내는 복도가 나타났다. 꺾어질 때마다 하나씩 보여주는 장면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끝에 나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작은 예배당은 '카펠라 디 마레(Cappella de Miare)', 즉 '바다의 교회'이다. 천장의 긴 창을 통해 햇볕이 들어와 벽에 빛의 십자가가 새겨졌다. 오사카에 지은 '빛의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다. 늘 작은 교회가 큰 감동을 준다. 제법 시간을 보내고 교회에서 계단을 올라가니 바깥 공간이 나타났다. 분수 풀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가까이는 종탑이, 멀리는 엘리베이터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백단원'이 보였다. 풀장 바닥에는 가리비 껍데기를 타일처럼 붙여 놓았다. 이곳에서 채취한 가리비 100만개를 모아다가 일일이 수작업으로 붙였단다.
풀장 위 둔덕의 백단원도 장관이었다. 100개의 화단을 의미하는 백단원은 화단마다 서로 다른 꽃으로 꾸몄다. 고베대지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토사 채취장 위에다 계단식으로 100개의 정원을 만들고 전 세계에 서식하는 100종의 국화를 심었다. 듬성듬성 겨울을 이기고 피워낸 꽃송이가 정겨웠다. 백단원 꼭대기에 오르니 유메부타이와 오사카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산책 정원 '프롬나드 가든'이 시작되었다. 키 작은 나무 너머로 푸른 바다를 끼고 조금 걷다 보니 다시 백단원 아래가 이어졌다. 한 바퀴 도는 회유식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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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지 그린하우스. |
야외극장까지 구경한 후 전 세계 식물을 모아놓은 아와지 그린하우스를 들렀다. 이 온실의 동선은 특이했다. 3층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였다. 위에서 먼저 온실 전체의 디자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의도인지 모르겠다. 온실 그 자체의 규모도 크지만, 내부의 온·열대 식물들도 잘 배치해놨다. 특이한 동선은 마주치는 식물마다 온실 전체에서의 위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온실의 관장이 이나다 준이치라는 조경계의 세계적 거장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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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미도 법당에 서쪽으로 난 주황색 격자창. 서방정토의 이상향을 건축으로 푼 것이다. |
나의 호기심을 심하게 자극했던 안도 다다오의 '물의 절'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연못 지하에 법당을 지어놓은 '미즈미도(水御堂)'다. 이곳은 '혼포쿠지(本福寺)'의 부속건물로 1991년에 지어졌다. 금방 사찰에 도착했지만 본당은 소박했고, '물의 절'도 보이지 않았다. 화살표를 따라 본당 뒷동산을 오르니 특유의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다. 벽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니 다시 벽이다. 그냥 보여주면 안도 다다오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벽을 들어서자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산과 함께 둥근 수련 연못이 펼쳐졌다. 그래도 법당은 보여주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비로소 미즈미도 법당이 나타났다. 법당은 서쪽을 향해 커다란 주황색 격자창이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방정토의 이상향을 건축으로 푼 것이란다. 천장의 빛을 들여 십자가를 표현한 '빛의 교회'와 같은 방식이었다.
법당 건물은 일반 건축물의 핵심 요소인 벽과 지붕이 없다. 대신에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땅속에 묻고 그 위에 연지를 만들어 연화세계를 얹었다. 불교의 공(空) 사상을 구현한 것이겠다. 안도 다다오. 이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공고 졸업에다 권투선수 출신이라는데, 그의 창의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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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즈카 오사무 기념관 내부. 오사카 테즈무의 초상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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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
섬을 나와 타카라츠카시(寶塚市)로 갔다. '아톰'의 아버지 테즈카 오사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1924년에 개관한 유명한 타카라즈카 극장 인근에 '테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철학적 메시지를 심은 거장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 자연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인 테즈카 오사무이다. 여덟 살에 만화집을 펴냈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테즈카는 수많은 캐릭터를 탄생시켜 '만화의 신'이라 불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밀림의 왕자 레오, 우주소년 아톰, 사파이어 왕자, 불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의외의 질문은 전 세계에 감명을 안겨주었다.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도 잊지 않았다. 만화라는 장르의 선입견은 테즈카의 작품 앞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의 만화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기념관에는 나의 어린 시절도 함께 했던 추억의 캐릭터들로 가득했다. 나도 20세기 언제쯤 레오와 함께 밀림을 누볐고, 아톰을 타고 우주를 날아다녔다. 안도 다다오와 테즈카 오사무를 통해 철학의 의미를 되묻는다. 인문학의 현재도 곱씹는다.
대구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권응상 대구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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