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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정 (소설가) |
경력이 꽤 있는 라디오 진행자가 토크쇼를 보며 혼잣말을 한다고 털어놓았다. 진행이 노련해졌다는 얘길 나누던 참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했더니 나름 도움이 된단다. 나 같으면 이렇게 말할 텐데. 거기서 그런 말을 한다고? 이건 정말 의외의 반응이네. 잽을 날려보고 어퍼컷도 맞아보며 화법을 익힌다고 했다. 다양한 상황에 적합한 어휘력을 기르고, 결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노련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혼잣말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짠해도 언어의 잔근육을 늘리기 위해 공들이는 자세에 신뢰가 갔다.
보이는 것을 문장으로 옮겨본다. 머릿속 내레이터가 쉼 없이 주절대다가도 옮겨적으려면 달아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절거려 나를 주변인으로 내밀면서도 막상 쓸 만한 문장을 낚기 힘들다. 문장이 안 되면 쓰고자 하는 내용이 뒤틀린다. 의도가 왜곡되고 문장에 갇히기 십상이다. 어정쩡하게 타협을 본 글은 볼품없다. 글을 쓰면서 곤혹스러운 순간은 쓰고 싶은 걸 표현하지 못해 감정의 크기를 줄이거나 의도를 비틀거나 식상한 방식을 빌려야 할 때다.
내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과 달리 글은 고칠 기회가 있다. 퇴고를 거듭할수록 좋아지거나 덜어내는 것이 미덕이라지만, 뭐든 요령껏 해야 한다. 앞에서부터 퇴고를 되풀이하면 첫 장만 손때가 묻어 새카만 '수학의 정석'이 된다. 공들여 다듬은 도입부를 두고 문장이 부러졌다는 합평을 받은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과하게 다듬은 문장이 담박하다 못해 똑 부러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부러진 문장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퇴고는 초고의 활력과 가독성, 명료함과 날카로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오래 고민하고 한꺼번에 써 내려간 글이 깊고 맑은 것을 안다. 뜻대로 해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종심(從心)'이라는데, 마음 가는 대로 써서 글을 완성하는 날은 언제나 올까. 챗GPT는 1초 만에 끝낼 일을 오늘도 끙끙댄다. 한참은 후졌다고 해도 별수 없다. 구석기인처럼 웅크리고 앉아 몸돌처럼 문장을 두드릴 수밖에.
배은정<소설가>

배은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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