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 미싱

  • 성욱현 시인
  • |
  • 입력 2024-01-02 08:52  |  수정 2024-01-02 18:14  |  발행일 2024-01-02 제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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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결수 作

미싱/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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