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20〉 황진이와 거문고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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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1-08  |  수정 2024-11-08 08:12  |  발행일 2024-11-08 제14면
거문고로 자신 유혹하려 한 벽계수에

"명인 아닌 풍류랑일 뿐" 웃으며 떠나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0〉 황진이와 거문고
박연폭포를 그린 겸재 정선의 '박생연도(朴生淵圖)'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최고의 시인이자 기생인 황진이. 박연폭포·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던 그녀는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송도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말한다. 허균(1569~1618)이 편찬한 야사집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보면 황진이가 거문고를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진랑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사내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으며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천을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금성에 이른 적이 있었다. 때마침 고을 수령이 절도사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기생이 가득하고 풍악이 넘쳐흘렀다. 진랑은 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았다. 이를 잡으면서 태연하게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좌중의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

화담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사모
존경 담아 거문고 선율 함께 즐겨

수령잔치 해진 옷 입고 등장해선
태연하게 거문고 타며 좌중 압도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0〉 황진이와 거문고
◆거문고로 소통한 서경덕과 황진이

이런 황진이는 당대의 명창인 선전관 이사종(1543~1634)과 6년간을 약정하고 함께 살기도 했고, 여러 인사들과 자유분방한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에게는 오직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서경덕을 진심으로 사모한 그녀는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거처에 가서 즐기다 돌아가곤 했다. 황진이가 거문고를 얼마나 잘 타고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황진이는 "지족선사가 10년을 면벽(面壁)하며 수양했으나 내게 지조를 꺾였지.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라 할 만하지"라고 말하곤 했다. 개성에 있는 성거산에 은거해 살던 서경덕도 이런 황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의 다음 시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황진이가 서경덕을 몹시 연모하며 애태웠음은 물론이다. 황진이의 이 시는 서경덕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언제 속였기에/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서경덕 또한 거문고를 사랑하고 즐겼다. 거문고에 대한 여러 편의 시도 남기고 있다. 그중 거문고에 새긴 '금명(琴銘)'의 일부다. '그대의 가락을 뜯으며(鼓爾律)/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樂吾心兮)/ 여러 가지 곡조를 고르되(諧五操)/ 밖으로 지나치진 않는다(無外淫兮)/ 절도로써 조화시키어(和以節)/ 날이 가고 사철이 바뀌듯하며(天其時兮)/ 통달함으로써 조화시키어(和以達)/ 봉황새도 법도를 따라 춤추게 한다(鳳其儀兮)/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鼓之和)/ 요순시대로 돌아가며(回唐虞兮)/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滌之邪)/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天與徒兮)'.

'우연히 짓다(偶吟)'라는 시도 남겼다. '잔월도 서쪽으로 진 뒤에/ 오랜 거문고 타기를 비로소 쉬네/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이 속의 오묘함이 어떠하냐(殘月西沈後 古琴彈歇初 明喧交暗寂 這裏妙何如)'.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0〉 황진이와 거문고
◆거문고로 선비 유혹

황진이와 소쇄양의 사랑 이야기도 전하는데, 여기서도 황진이의 거문고는 빠질 수 없었다. 어느 날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소세양이 황진이가 뛰어난 명기라는 소문을 듣고 "나는 한 달간 황진이와 같이 살아도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 단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장담했다.

이 소문을 들은 황진이가 의도적으로 소세양을 찾았고, 소세양은 그녀를 보자 바로 넋을 잃었다. 그리고 만난 지 한 달이 지나 이별하는 날이 왔다. 이때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를 지어주었다. 소세양은 이 시를 보고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말하며 처음의 호언장담을 꺾고 한참 더 머물게 되었다. 그 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달 아래 오동 잎 모두 지고/ 서리 속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처럼 맑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젖어 향기롭기만 하네/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없으리(月下梧桐盡 霜中野菊黃 樓高天一尺 人醉酒千觴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明朝相別後 情輿碧波長)'.

황진이와 벽계수의 이야기는 황진이의 아래 시조와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와 벽계수의 이야기는 그녀가 거문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서유영(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전하는 이야기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1539~1612)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겠소"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했다.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쫓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이달이 황진이가 거문고를 각별히 좋아함을 알고는 거문고를 타면서 유혹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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