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빵세권'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역세권이 지하철역과 가까운 곳을 뜻하듯, 빵세권은 맛있는 빵집이나 카페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동네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농촌에서는 조금 낯설다.
칠곡군 기산면의 한 청소년이 해준 이야기가 특히 인상 깊었다. 기산면에서 가장 가까운 베이커리 카페는 낙동강을 건너 왜관읍내까지 50분을 걸어가야 도착한다. 도시의 감각으로 보면 '빵세권'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그런데 그 친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멀어도 상관없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놀면서 걸어가다 보면 50분이 길지 않아요. 같이 걸어갈 친구가 있느냐가 더 중요해요."
나는 그동안 거리를 숫자로만 계산하며, 멀수록 불편하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50분은 단순한 이동 시간이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고, 혹은 주말 오후에 친구들과 길을 나서 장난치고 수다를 떨며 걷는 시간이었다. 풀밭 옆을 지나고, 강둑을 건너며, 바람과 햇볕을 함께 느끼는 길이었다. 목적지는 빵집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이미 '빵세권'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가깝다'와 '편리하다'를 좋은 조건의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작은 농촌 마을의 빵세권은 다른 기준을 보여준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그 거리를 함께 걸어줄 사람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멀어도 즐겁고, 오래 걸어도 아깝지 않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과의 관계다.
최근 행정구역 조정과 생활권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예전처럼 마을 단위로 뚜렷이 구분되는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제 읍·면 단위의 넓은 범위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고, 가게나 시설까지의 거리는 길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 넓은 공간 속에 흩어져 살아간다. 이 속에서 생활 범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의 존재다.
빵세권이 단순히 가게와의 거리를 재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말이 된다면 어떨까. 먼 길도 기꺼이 함께 걸어줄 관계가 있는 곳이야말로 생활의 중심이자, 삶을 지켜주는 안전망이 되는 관계권·문화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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