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진 대구대 총장
이번 여름은 더위가 유난히 길고 비도 심하게 왔다. 윤달이 있어 더위가 오래간다고 하신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올해는 가을이 천천히 오겠거니 생각했더랬다. 어느새 9월도 중순으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맹위를 떨치며 끝날 줄 모르던 늦더위도 한풀 꺾였다. 아침저녁 산책길에 듣는 풀벌레 소리도 한여름과는 사뭇 다르다. 이래저래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섭리가 놀랍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한다. 독서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필자 세대는 종이책을 읽고 연필로 독후감을 쓴 세대다. 독후감을 잘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방학을 맞아 숙제로 받은 두꺼운 책을 읽을 때면 한순간 감동에 젖었다가 막상 독후감을 쓰려면 누군가 긴 글을 요약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AI가 글을 요약해주는 요즘 세대는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더랬다.
책 속에는 진리와 모험도 있고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있다. 누군가의 힘든 현실과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현실에는 없는 세상을 상상으로 만날 수도 있다. 낯선 세상을 만나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어린 왕자가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비장한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불멸의 진리를 고민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거나 시인이 되는 등의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어린이는 청년이 되고 다시 어른이 된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인구 10명 중 6명은 일 년 동안 책을 1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독서인구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1인당 독서량도 매년 감소 추세다. 필자 세대는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시대에 누가 책을 읽는가 반문하는 것이 요즘 세태다. 디지털 대전환으로 인쇄매체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여길 법도 하다.
빠르게 발전하는 정보통신 환경은 디지털 매체를 융성하게 하고 사람들은 디지털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진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소비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가 넘쳐난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온라인 매체가 일상화되었다. 반면에 종이책은 우리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어느새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아동들과 학생들, 청년들은 디지털 환경에 아주 익숙하다. 교실에서도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책이 귀하게 대접받던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단순히 종이책을 멀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 자체를 멀리하는 세태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지대하고 인문과 과학 강좌도 열풍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특히 청소년기에 종이책이 전자책보다 두뇌 발달에 훨씬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종이책은 요즘 세상에 드문 아날로그 감성이 있다. 종이의 질감과 책장을 넘기는 손맛이 있다. 빠르게 화면을 넘기는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다. 인쇄된 글을 보는 것은 느린 호흡으로 할 일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여 인간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도 찰나적이고 피상적인 관계가 지배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이책을 잡고 한 장씩 넘기는 그런 여유가 필요하다. 마침 가을이 오고 있다. 책 읽기 딱 좋은 계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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