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률의 세상읽기] 한국 교회, 진정 회개할 때다

  •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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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09 06:00  |  발행일 2025-09-08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나라가 많이 뒤숭숭하다. 격동하는 국제정세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 사정도 그 못지않다. 윤석열-김건희발(發) 짜증 뉴스에 개신교계발(發) 부끄러운 뉴스들까지 더해져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정통 개신교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신천지와 통일교뿐만이 아니다. 정통 개신교단의 지도자들까지 권력 유착 관련 구설을 쏟아내며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급기야 한미정상회담과 국익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우리나라 개신교는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 87년 전 오늘, 개신교 치욕의 날


87년 전 오늘, 1938년 9월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양에서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시작됐다. 이튿날 오전에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두고두고 치욕스러운 결정이 내려졌다.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를 의결한 것이다. 그리고 낮 12시, 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신사를 찾아 참배했다. 실은 장로교단 외의 대부분 개신교 교단과 가톨릭도 이미 신사참배를 시작한 뒤였다. 유일신교인 가톨릭과 개신교가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나선 것이다.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논리를 댔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꼴이었다. 노골적인 침략전쟁 협력과 친일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더 큰 문제는 그 후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퇴한 후에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교회를 지켰다'며 항변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해방 후에도 교단 지도자로 남았다. 그들에게 참회와 회개를 요구한 참 신앙인들이 교단을 분리해 독립했을 정도였다. 권력에 순응하는 것은 교회의 관행과 문화가 됐다. 정치권, 군, 경찰, 학계가 모두 친일 청산에 실패해 나라의 혼란을 키운 것처럼 교회도 권력과 돈을 숭상하는 배교의 길에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한 것이다.


그 뒤 한국 교회는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군사독재와 손을 잡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유신헌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다.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궤변까지 동원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광주 시민을 총칼로 학살한 뒤에도 교회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독재자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이들의 영혼과 유족의 한은 외면당했다.


물론 참회의 순간이 전혀 없진 않았다. 2007년, 몇 개의 개신교단이 과거 신사참배에 대해 공식 사과와 회개 선언을 채택한 것이 대표적이다. 몇몇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참회한 적도 있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사회적 약자와 인권을 위해 싸운 개신교 지도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소수였다. 주류는 늘 권력과 손잡고 돈과 부흥을 향해 내달렸다.


# 이어진 배교 행진, 그 끝은 극우


배교 행진은 1987년 민주화 후에도 계속됐다. 2007년에는 장로 대통령 만들겠다고 팔을 걷어부쳤다. 대통령이 된 이명박 장로는 퇴임 후 추악한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국가적 망신이고 수치였다. 이어서 주류 개신교가 당선시킨 박근혜 대통령마저 국정농단으로 탄핵되고 구속됐다. 하지만 대선 때마다 팔 걷고 뛴 개신교 지도자들이 반성했다는 말, 국민 앞에 사죄했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계의 권력 유착과 타락은 극우를 이끄는 전광훈 등으로 꽃피고 있다. 그들은 강단에서, 광화문에서 '하나님이 문재인을 쫓아내라고 했다'라며 노골적인 정치 선동에 나섰다. 신도들과 사회에, 심지어 하나님에게 이렇게까지 안하무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2022년 대선에서도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윤석열 후보를 '하나님이 세운 후보'라며 띄웠다. 후보 때부터 주술-무속과의 관련이, 최근에는 통일교-신천지 등과의 유착 사실이 드러났지만 개신교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12·3 내란은 정당했다며, 그의 탄핵이 잘못됐다며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일부 대형 교회들의 강단은 벌써 극우 담론장으로 전락했다.


뿐만 아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권력과의 유착 수준을 넘어 스스로가 이미 권력이 되었다.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고 억압하는 주체로 선 것이다. '감히 날 건드려?' 식의 반응도 그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늘 이단, 사이비라고 내쳤던 통일교와 신천지와 전광훈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사참배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회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개신교의 권력 유착과 극우화는 다분히 자발적이고 노골적이다. 사회도 법도 묵과하기 힘들 만큼 도를 넘어섰다. '종교 탄압'이라는 낡은 논리로 방어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물론이고 개신교 자신의 근본까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지금, 회개할 때다


신앙과 교회는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순간 더 이상 교회일 수도 신앙일 수도 없다. 특정 정치진영과 이념의 대변자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생명을 살리는 복음일 수도 없다. 혐오의 주체로 서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라 말할 수도 없다. 극우의 온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87년 전 9월9일과 10일, 장로교단의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 교회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묻는 역사적 질문이다. 이제라도 교회는 답하고 결단해야 한다. 계속 불의한 권력에 기대 돈을 탐하며 권력과 함께 타락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예수의 길로 돌아설 것인지.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혐오와 선동으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극우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갈라진 사회를 화해시키는 사랑과 섬김과 평화의 소명을 실천할 것인지.


교회가 신앙을 회복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해 가는 길은 단 하나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빛과 진리의 편에 서는 것, '이념'과 '혐오'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증언하는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87년 전 신사참배 이후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더 이상 묻어두거나 외면하지 않고 지난날 배교의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신사참배보다도 더한 배교인 주술과 무속과 부패한 권력과의 유착 관계부터 청산하는 결단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사랑과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손가락질만큼은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고 나라도 편안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진정 회개운동에 나설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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