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窓]의료는 더 이상 정치의 실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 황인아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르네여성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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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10 06:00  |  발행일 2025-10-09
황인아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르네여성의원 원장

황인아 대구시의사회 홍보이사·르네여성의원 원장

지난 전공의 사태 이후 의료계는 여전히 깊은 후유증을 겪고 있다. 수도권 대형병원들은 겉보기엔 안정된 듯하지만, 지방의 현실은 다르다.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같은 필수 진료과는 소멸 직전이다.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줄어들고, 일부 지역에서는 응급수술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이 문제는 단순한 일시적 혼란이 아니라, 의료 인프라의 붕괴라는 경고음이다.


물론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은 것도 있다. 전공의들의 근무환경이 이전보다 나아졌다. 밤새 당직을 서고도 다시 새벽부터 수술과 진료에 투입되던 현실이 조금은 바뀌었다. 당직 다음날은 휴식이 보장되고, 휴가도 근로기준법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더 이상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자각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이 국민 전체가 감내해야 했던 의료공백의 대가로는 너무나 작다.


국민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 분노했고, 언론은 연일 의사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냉정히 묻고 싶다. 그 분노 끝에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닫힌 응급실, 연기된 수술, 지방의료의 붕괴, 필수과 의사의 이탈. 우리가 잃은 것은 너무 많다. 의사들을 비난하며 분노를 쏟아내는 동안, 정작 환자의 안전은 위태로워졌다. 의료는 누군가를 탓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해법으로 의대 정원 확대를 내세웠다. 그러나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흉부외과나 외과, 산부인과로 자발적 지원이 늘어날까? 현실은 냉혹하다. 젊은 의사들이 기피하는 이유는 근무환경, 수입 구조, 법적 위험 때문이다. 정원을 늘린다고 이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숫자'라는 정치적 명분만 남고, 의료의 본질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난다.


지금의 의료정책은 국민의 생명보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구호는 선심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의료현장을 모르는 정치의 산물이다. 의료를 '표심 관리'의 도구로 삼는 사이, 의료는 점점 정치의 실험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의사는 적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현장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의료는 존중보다 비난을, 협력보다 통제를 받고 있다. 정치가 의료를 이용하는 동안, 우리는 다시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의료의 회복은 의사 수가 아니라 신뢰에서 시작된다. 정치가 의료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의료인이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의료계 내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한국의 의사들은 현실적으로 의료정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정책은 늘 공무원과 정치인의 손에서 결정되고, 현장은 그 결과에 따라 흔들릴 뿐이다. 의료를 가장 잘 아는 의사들이 방향을 세우고, 현장을 기반으로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의사들은 권위적 지시보다 동료와 선배의 조언에 더 귀 기울인다. 그렇기에 의사들이 서로 논의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세워 의료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기관이 있다면, 의사의 권익뿐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도 함께 강화될 것이다. 정치가 아닌 의료가 스스로 해법을 찾아갈 수 있는 구조,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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