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추 거문고 이야기] <42> 선승과 몰현금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 |
  • 입력 2025-10-09 16:12  |  발행일 2025-10-09
몰현금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해 노래한 토굴가를 남긴 나옹 스님의 부도. 문경 대승사 묘적암 가는 길옆에 있다. 묘적암은 나옹 스님이 출가한 곳이다. 이지용기자

'몰현금'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해 노래한 '토굴가'를 남긴 나옹 스님의 부도. 문경 대승사 묘적암 가는 길옆에 있다. 묘적암은 나옹 스님이 출가한 곳이다. 이지용기자

불교 선승(禪僧)에게도 거문고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줄 없는 거문고인 '몰현금(沒絃琴)'은 불교적 깨달음을 비유하는 상징물로 인용되곤 했다. 선승들의 수행과 깨달음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활용되었는데, 불가에서는 '무현금(無絃琴)' 대신 '몰현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몰현금은 소리를 내는 줄이 없어도 물리적 소리를 넘어선,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와 가락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이 소리는 언어나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 번뇌와 분별심 등을 벗어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그 사례를 보자.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지은, 고려 말의 대표적 선승인 백운(白雲) 경한(景閑·1299~1375)의 선시 '산거(山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산은 푸르고 푸르며 물은 파랗고/ 새는 재잘대고 꽃은 활짝 피었네/ 이 모든 것 줄 없는 거문고 곡조이니/ 푸른 눈의 호승(깨달은 스님)이 보아도 보기에 부족하네'.


이 시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불교의 진리, 즉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소리 없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줄 없는 거문고를 통해 자연의 본질이 곧 깨달음과 진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의 거문고와 관련된 선시 '현욱 선화에게 주다(贈玄昱禪和)'이다. '평생 줄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싶었지만/ 동서로 지음을 만나지 못해 슬프구나/ 궐리(闕里:공자 고향)의 가을 햇볕에 일찍이 등을 쬐었고/ 소림의 차가운 달빛에 다시 마음을 깨달았도다/ 솔이나 바위 아래 앉아 천지를 잊고/ 꽃이 피고 지는 속에 고금을 보낸다네/ 못 속에 있는 구슬 밝게 빛나는데/ 어찌하여 미치고 취해 화침(華鍼:허상)을 주우려 하는가'.


'여관 지나다 거문고 소리 듣고'에서는 이렇게 읊고 있다. '백설 같은 고운 손 어지러이 움직이니/ 가락은 끝났으나 정취는 남아있네/ 가을 강물 거울 빛을 열어/ 푸른 산봉우리 바로 그려내네'.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실려 있는 이 시는 거문고 소리를 통해 느껴지는 여운과 함께 가을 강의 풍경을 묘사하며, 고요하고 맑은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몰현금과 불교의 깨달음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는 몰현금(沒絃琴)과 같은 의미로 무진등(無盡燈:꺼지지 않는 등불), 무근수(無根樹:뿌리 없는 나무), 무저발(無底鉢:밑 없는 발우), 무공적(無孔笛):구멍 없는 피리) 등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몰현금'은 줄이 없기에 무한한 열반의 묘악을 연주할 수 있다. 줄이 있으면 줄이 가지고 있는 소리밖에 낼 수 없지만, 줄이 없으므로 무한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일체의 상대적인 생각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절대의 경지, 불립문자의 경지와 연결된다. '심금을 울린다'고 할 때의 심금(心琴)을 울려야 이에 가까워질 수 있다. 모두가 마음의 거문고를 울리게 되면 불국토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 선승인 나옹 스님(1320~1376)이 지은 '토굴가' 중 일부다. '의식에 무심 커든 세욕이 있을 소냐/ 욕정이 담박하니 인아사상 쓸 데 없고/ 사상산이 없는 곳에 법성산이 높고 높아/ 일물도 없는 중에 법계일상 나투었다/ 교교한 야월 하에 원각산정 선뜻 올라/ 무공적을 비껴 불고 몰현금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이 이중에 갖췄더라/ 석호는 무영하고 송풍은 화답할 제/ 무착령 올라서서 불지촌을 굽어보니/ 각수에 담화는 난만개더라.'


여기에도 몰현금과 무공적이 나온다. 무공적과 몰현금에 갖춰진 '무위자성진실락'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토굴가는 선 수행의 과정과 득도 후의 열락을 노래하고 있다. 서두에서 청산 깊은 곳에 초옥을 지어두고 봄날을 완상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대사가 무엇인지 자문한다. 이어 10년을 궁구한 결과 깨달았음을 말하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 현상이 부처의 세계임을 설파하고, 마지막으로 득도 후 누더기 옷 걸치고 세상 욕심 던져둔 채 무공적을 비껴 불고 몰현금을 높이 타며 무위진락을 누리는 자유로움을 노래했다.


◆적절한 조율이 중요


불교 경전 '잡아함경'에 수행법으로 중도의 중요성을 비유하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쉼도 없이 정진하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성문 가운데 나도 들어가건만,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구나.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한다면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나 하고 복을 지으며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나의 이런 마음을 알고, 한 비구 스님을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했다. 부처님은 소나에게 말했다.


"소나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렇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그 줄을 너무 팽팽하게 조이면 어떠하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줄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때도 올바른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조이거나 늦추지 않고 알맞게 잘 조율해야지만 맑고 좋은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네 마음 공부도 그와 같다. 너무 조급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긋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니 알맞게 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하고 안락해야 한다.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나는 크게 깨달아 이때부터 제대로 정진했고, 머지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