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창] 일본 속의 한국을 만나다

  • 김경호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대경영상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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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07 06:00  |  발행일 2025-11-05
김경호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대경영상의학과 원장

김경호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대경영상의학과 원장

초가을의 산속을 걸었다. 일본의 우지(宇治)시 근교 산속은 푸르른 녹음이 아직 짙었고 강물 소리가 시원했다. 가끔 지나치는 강태공의 낚싯대가 한가로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마가세 구름다리와 그 근처에 있을 작은 비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1943년 6월, 교토에서 유학 중이던 시인 윤동주는 친구들과 우지시 근교로 소풍을 떠났다. 강물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에서 친구들과 찍은 흑백 사진 속에서 윤동주는 담담히 미소 짓는다. 한 달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17년, 소풍 장소인 우지강변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일본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제작된 시비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시비의 하단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라고 적혀 있어 시비 건립에 담긴 깊은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시인 윤동주는 오래전 바람과 별이 되었지만 일본 속에서 그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일본 속의 한국은 또 있었다. 고베시 외곽 신나가타에서 만난 카페 '고베 코리아 교육문화센터'는 재일교포들의 역사를 간직한 기록의 공간으로 재일교포 후세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마련된 기억의 장이었다. 해방 전후 재일교포들의 삶을 전시한 모형과 흑백 사진 속에서 한복 저고리 차림의 얼굴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구두 제작 틀과 각종 제화 기구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의아했으나, 고베지역 재일교포들이 신발 공장에서 주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허름한 목조공장 안에서 배고픔과 차별을 이겨내고 신발을 제작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은 이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영세한 공장은 지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수백 개의 공장이 무너지고 불에 타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다. 복구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민간, 재일교포 사회 내에서도 민단과 조총련이 정보를 공유하며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1만여 재일교포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일본행은 대구시의사회와 재일한국의사회의 치매 및 재택방문 의료에 관한 국제학술 세미나와 공동 해외 의료봉사를 의논하기 위함이었지만, 일본 속 한국의 발자취를 보면서 한일 양국의 오랜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역사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동양 예술의 극치'라며 격찬한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은 신라의 유품이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7대 사찰인 광륭사(廣隆寺)는 신라계 도래인인 진하승(秦河勝)이 건립하였고, 진하승 부부는 목조 반가사유상 바로 옆자리에 목조상으로 영원히 남았다. 천년이 흐른 뒤 시인 윤동주의 자취는 교토시와 우지시에 3개의 시비로 남았다. 특히 해방 후 아직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일교포 40만 명은 그 자체로 일본 사회 속에서 한국의 삶과 숨결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때로 협력하고 때로 갈등하며 이어온 한일 양국의 긴 역사를 돌아보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미래를 열어 나가는 것은 지금부터의 숙제이다. 수천 년 전부터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와 기술, 사상의 깊은 교류를 이어온 이웃인 일본은 어쩌면 운명 공동체라 불리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 공동 번영을 위해 가장 필요한 화두는 '기억과 화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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