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레드리본인권연대 대표
대구 동구의 끝자락, 붉은 리본이 전면을 감싸고 있는 카페 '빅핸즈(Big Hands)'는 조금 특별한 공간이다.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을 닦고,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이들 중에는 HIV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 사실로 구분되지 않는다. '감염인'이라는 낙인은 문 앞에서 멈추고, 오직 '동료'와 '시민'이 함께 일한다. 지역의 한 카페에서 시작된 이 일상적인 풍경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통제와 낙인의 언어로 HIV를 다루는 현실 속에서 작지만 강렬한 전환의 장면을 보여준다.
1985년, 한국에서 첫 HIV 감염이 보고된 이후 40년. 우리는 오랫동안 HIV/AIDS를 공포와 관리의 대상으로 다뤄왔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감염인을 치료와 돌봄의 주체로 보기보다 '감시의 대상'으로 규정했고, 낙인은 제도와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하지만 HIV 40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감염인을 배제의 언어로 통제하던 시대를 지나, 함께 살아가는 법을 제도 속에 새겨야 할 때다.
그 변화의 가능성을 지역에서 현실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이다. 2012년, 감염인 당사자들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일터를 만들자"는 뜻으로 세운 이 협동조합은 현재 직영카페 '빅핸즈' 8호점을 운영하며 감염인에게 노동의 경험과 사회적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치료와 생계,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상이 펼쳐진다. 감염인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사회를 일구는 주체다.
레드리본의 활동은 일자리 창출을 넘어선다. 2005년부터 운영해온 요양쉼터를 2020년 사회주택 '꿈담채'로 전환해, 감염인과 취약계층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주거'의 모델을 만들었다. 의료연대기금 '레드케어'는 제도와 보험의 틈새에서 감염인들이 서로의 치료비를 나누며 만들어낸 '시민의 안전망'이다. 또 최근 문을 연 '모두의 치과'는 감염 여부로 진료가 거부되지 않는, 이름 그대로 '배제 없는 의료'를 실천하고 있다. 이 일련의 활동은 "감염인도 돌보는 사람이며, 사회를 함께 만드는 존재다"라는 공통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실천의 중심에는 레드리본인권연대가 있다.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 대구경북 HIV/AIDS 감염인 자조모임 '해밀',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가 함께하는 연대체로, HIV 장애인정 운동과 감염인의 시민성 회복을 위한 인권운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복지의 수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연대의 주체로 서겠다는 선언이다.
전라북도에서는 몇해 전 전국 최초로 '에이즈예방 관리 및 지원 조례'가 제정되어, HIV 감염인을 사회의 위험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바라보는 제도적 전환을 시작했다. 이제 대구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제도화할 때다. 대구는 이미 레드리본의 23년의 활동을 통해 감염인이 지역 속에서 일하고, 살고, 돌보는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이제 제도와 행정이 응답해야 한다. 우리 지역에서 감염인의 인권과 복지를 담보하는 제도(HIV지원 조례, 돌봄특화모델 도입등)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의 시민성을 확장하기 위한 필수 과제일 것이다.
지난 12월 1일은 세계에이즈의 날이었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당사자들이 사회를 함께 돌볼 수 있는 제도적 토대는 마련되어 있는가? 레드리본의 실천은 이미 답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에이즈 40년, 기억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낙인에서 존엄으로, 통제에서 공존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이 전환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 전체로 번져나가길, 그것이 세계에이즈의 날이 우리에게 남기는 과제다.
김지영 레드리본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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