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보이지 않는 헌신 위에 국제행사의 품격은 세워진다

  • 박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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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10 14:49  |  발행일 2025-12-10
박철호<한국관광공사 부산울산경남지사 선임차장, 2025 APEC 자원봉사자>

박철호<한국관광공사 부산울산경남지사 선임차장, 2025 APEC 자원봉사자>

국제행사의 성공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묵묵히 쌓이는 준비에 달려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근무하며 지역 관광과 국제행사 현장을 여러 해 지켜본 필자는, 최근 APEC 2025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이 사실을 더욱 깊게 체감했다. 관광은 사람의 이동과 안전이 결합된 영역이며, 행사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안전 인력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국가 자원'이었다. 그 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관광 실무자의 관점을 넘어, 안전 기반시설이야말로 국가 품격을 결정하는 본질적 인프라임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APEC 기간 동안 필자가 가장 깊은 울림을 받은 순간은 세계 정상들이 모인 회의장도, 찬란한 조명도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소방·군인 등 경비·안전 담당 인력들이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던 조용한 뒷모습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비상구 주변, 어두운 외곽도로, 무대 뒤편의 흐릿한 통로에서 그들은 위험을 미리 차단하고 동선을 관리하며,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했다. 그들의 존재는 행사장의 모든 화려함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며 "국가의 품격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깊이 느꼈다.


그렇기에 필자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행사 중 단 한 건의 사고라도 났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악몽 같다. 국제행사의 '무고함'은 철저한 대비 위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신의 가호에만 의존할 수 없는 일이다. 사고가 없었다고 해서 완벽한 운영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위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며, 다만 그 위험을 시민들이 느끼지 않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이번 APEC을 큰 문제 없이 치렀다는 사실은 은혜이자 기적 같은 일이지만, 기적은 반복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포스트 APEC 경비·안전망'을 체계적으로 세워야 한다.


행사 이후 필자가 일상에서 느낀 문제의식은 더욱 분명해졌다. 지인을 만나기 위해 들렀던 경주경찰서는 노후한 시설을 감추지 못했으며, 오래전 인도 지방 도시에서 경험했던 후락한 공공기관을 떠올리게 했다. 오래된 공공 인프라는 시민에게 불안감을 주고, 현장에서 뛰는 인력에게는 제약을 강요한다. 실제로 일부 경찰 시설은 준공된 지 반세기가 넘었다. 이는 국가 안전 인프라 재정비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준다.


필자는 "형식이 내용을 담보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현대적 시설이라는 '형식'이 갖추어져야, 그 안에서 정교한 경비·안전 시스템이라는 '내용'이 제대로 작동한다. 낡은 건물과 뒤처진 설비 위에서는 어떤 시스템도 완전하게 기능할 수 없다. 기반시설의 현대화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운영 철학이며, 안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한편, APEC 차기 개최국인 중국이 한국의 치안 협업 체계와 운영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공식 방문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운영 표준이 이미 국제적 신뢰를 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할수록, 우리는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우리의 기반시설과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


APEC 2025는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에 어떤 유산을 남길지 결정하는 자리였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새벽의 경비 인력, 그들의 땀과 인내, 그리고 시민이 느끼지 못한 수많은 대비는 대한민국의 품격을 지탱한 가장 소중한 기록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국가의 안전망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 '누구도 보지 않았지만 모두가 의지한 사람들'의 헌신 위에 쌓인 신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박철호<한국관광공사 부산울산경남지사 선임차장, 2025 APEC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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