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한국현대판화전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에 전시된 김억의 '도산구곡'. '횡권족자' 형식의 길이 438㎝에 이르는 작품이다. <인당뮤지엄 제공>
이미지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판화는 미술사에서 시각문화의 대중화를 이끈 매체로 평가된다. 초기엔 그림의 복제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후 나무·금속 등 판의 재질, 선의 질감, 흑백의 대비, 찍어내는 과정 자체가 표현이 되는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판을 새기고 찍어내는 아날로그 판화가 오히려 오리지널의 가치를 지닌 장르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이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한국 현대판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특별 기획전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를 오는 5월23일까지 연다.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한국현대판화전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에 이윤엽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인당뮤지엄 제공>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판화의 역사와 현재를 아우르는 작가 12명의 작품 130여 점과 관련 유물 20여 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원화·판화 전문 미술관인 그라블린미술관의 제안으로 공동 기획됐다. 인당뮤지엄에서 먼저 선보인 뒤, 오는 6월28일부터 그라블린미술관에서 열리는 'K Prints' 전시로 이어진다. 프랑스 전시에서는 김우조·김서울 등 대구 출신 작가들의 작품과 주정이·이윤엽·류연복 작가의 작품이 소개될 예정이다.
김정 인당뮤지엄 관장은 "그동안 한국에서 프랑스에 제안을 많이 했는데, 이번엔 그라블린미술관이 역으로 제안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한국의 판화 작가, 그 중에서도 대구 작가들을 유럽에 소개할 수 있는 뜻깊은 계기가 될 것 같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권미옥 인당뮤지엄 학예연구실장이 김우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지난 1일 권미옥 인당뮤지엄 학예연구실장이 이성자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권미옥 인당뮤지엄 학예연구실장은 "김우조 등의 작가는 프랑스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한국현대목판화 부문에서 중요한 분들인데, 프랑스에서 단독 주제 전시를 한 적이 없었다"며 "한국의 판화를 미술관급 규모에서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첫 시도인 만큼, 이번 전시는 프랑스에 한국판화의 정수를 알리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프랑스에서 이어지는 전시는 프랑스 문화부에서 한 해에 단 20개 전시에만 부여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전시'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한국 판화가 품어온 삶의 풍경과 시대의 이야기를 '일상' '역사' '서정' '도시'라는 4개의 섹션으로 나눠 한국 판화의 흐름과 동시대적 감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일상, 나무와 칼'에서는 김성수, 이윤엽, 주정이의 작업을 중심으로 판화의 가장 근원적인 재료인 나무와 칼에서 출발하는 창작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어 '역사,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는 이성자, 김우조, 류연복, 김억의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역사적 흐름과 시대의 기억을 판화의 언어로 되새긴다. '서정, 시처럼 바람처럼'에선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구 출신 재불 작가 정현과 안정민의 작품을 통해 자연과 삶의 정서를 섬세하게 담아낸 한국적 서정성을 조명한다. '도시, 여기 지금'에서는 이언정, 정승원, 김서울의 작업을 통해 현대 도시와 동시대 삶의 풍경을 판화라는 매체로 새롭게 해석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판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동시에 작가별 특징을 살펴보는 재미도 더한다. 대구 출신 작가 김우조의 작품은 포항 '죽도시장' 등 1970년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다. 판법과 형식에 있어 목판화와 지판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여온 김우조는 대구에서 판화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판화라는 매체를 발견하고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며 이를 예술로 자리매김하도록 한 작가로 평가된다.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한국현대판화전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에 정현 작가의 '들판Ⅰ'과 조선 후기 유물 '윗닫이'가 함께 전시돼 있는 모습. <인당뮤지엄 제공>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이성자는 유화와 목판화에서 특유의 한국성을 담아내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성자가 1970년에 제작한 '환호하는 숲'은 그라블린미술관과 인당뮤지엄이 동시에 소장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 기획의 매개가 되기도 했다.
김억은 붓보다 더 섬세한 칼끝으로 역사와 삶의 공간인 이 땅을 목판에 새긴다. 이번 전시에선 '횡권족자' 형식의 길이 438㎝에 이르는 '도산구곡'과 낱장 9장으로 새긴 '무흘구곡'을 선보이는데, 작품 곳곳에는 역사의 장소와 현재의 삶의 공간을 연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정현은 에디션이 없는 유일판 목판 작업과 카보런덤 기법을 활용한 알루미늄판 판화를 통해 판화 매체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다. 판화의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정현의 작품은 동양화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 관장은 "판화는 단순한 복제의 기술이 아니라 나무와 칼, 시간과 노동을 통해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새겨 넣는 예술"이라며 "자연과 일상, 역사와 도시를 담아낸 한국 판화의 다양한 흐름을 통해 관람객들이 우리 삶 속에 스며든 서정과 시대의 흔적을 새롭게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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